[연원 및 변천]
제정러시아는 1860년 청과의 베이징 조약으로 극동 지역의 영토를 두만강 하류 유역으로 확장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의 국경관리는 허술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시적 이동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고국을 떠나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타국으로 이주하고 정착하는 일인데 이것은 별개의 것이다.
조선의 신민들이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러시아령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연대에 대해서는 1863년 혹은 1864년으로 많은 논란이 있지만, 러시아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시기는 1864년이다. 1864년 초 겨울에 함경도 지방 무산의 최운보와 경흥의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남우수리스크 지역에 영구 거주를 목적으로 촌락(지신허)을 만들었는데 이때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이는 바로 우리 한인동포들의 해외이주 기원이 되었다. 1864년 9월 21일(러시아 신력 10월 3일) 조선인 거주지역을 담당하던 남우수리스크 지역의 포시에트 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인 레자노프는 상급 지휘관인 해군소장 카자케비치에게 한인들의 이주사실을 문서로 공식 보고함으로써 한인 주거지역에 관한 러시아 당국의 공식적인 승인절차가 이루어졌다. 바로 이 문서에 근거하여 러시아 당국에서는 1864년을 조선 백성들의 이주 첫 해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훗날 1914년에 이주 50주년을 기념하려고 했던 러시아 극동지방 한인들의 준비과정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조선에서 조국을 떠나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이주하려는 한인들의 수는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문서자료에 의하면 1867년 1월 기준으로 185가구 999명으로 파악되었고 한인 마을도 지속적으로 형성되었다. 1877년의 자료에는 남우수리스크 지역 거주 한인이 6,142명으로 밝혀졌고 촌락만 20곳이었다.
1884년에 조선과 러시아 간의 국교가 수립되어 이때까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은 모두 러시아 국적을 받았다. 이후 입국한 한인들은 임시거주증을 받아야 했으며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다.
1895년 기준 러시아의 극동 지방인 프리아무르 관구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 중 거주등록이 된 사람들은 18,400명 규모였다. 1897년 제정러시아의 전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거주 한인들은 총 26,005명으로 조사되었다. 이 중에서 절대다수인 25,996명이 시베리아와 극동 지방(사할린에는 67명)에 있었고, 나머지 9명 중 2명은 유럽러시아 지방에 7명은 중앙아시아 지방에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볼 때 20세기가 되기 전에 한인들은 극동 러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유럽 러시아(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그와 볼가강 도시인 사마라)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까지 이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대에도 여전히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가 이루어졌고 러일전쟁 직후 러시아 극동 지역에만 34,000 여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러시아 국적자는 절반 가량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인 중에도 러시아 국적을 지닌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북위 50도를 경계로 사할린의 남부 지역은 일본령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 극동 지역은 한인 의병들의 활동과 독립군의 기지로서도 역할을 하였다. 즉 포시에트 지구에서 최재형은 최초로 의병조직을 만들었고 이범윤과 이상설은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안중근 또한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0년이 되면 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수는 더욱 더 증가하였다. 프리아무르 관구의 3개 행정구역(연해도, 아무르 도, 자바이칼 도)에만 52,868명의 등록된 한인들이 있었고, 5년 뒤인 1915년의 통계로는 72,600명까지 늘어났다.
1914년에 러시아는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거주 한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왜냐하면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가 형성됨으로써 다수의 한인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혁명 직후의 볼쉐비키 정권과 반혁명파들 간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군이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침략하여 한인독립군들의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 신생공화국 소련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발간했던 <선봉> 등 신문들의 기조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었다. 소련의 한인들이 절대적으로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극동 지방이었지만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소련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삶의 터전을 형성하고 있었다. 현재의 우수리스크 시에는 ‘조선인 사범대학’도 운영되고 있었고, 이후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톡(원동 고려사범대학)에도 한인 교원의 양성을 위한 사범대학이 설립되었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던 한인들은 연출가, 연극 배우들이 중심이 되어 예술단을 만들었고 마침내 1932년에는 한인극장(고려극장, 조선극장)을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극장의 공연은 우리의 전통문학과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경제적으로는 1929년부터 스탈린의 농업집단화 정책에 의하여 한인 집단농장이 조직되어 새로운 형태의 농업경영 방식에 적응하여 유능한 농사전문가들을 배출하였는데, 20년대 중반에 조직된 협동조합을 통하여 한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 최초의 인구조사(1926년)에서 한인은 총 86,999명으로 파악되었고, 대부분(85,886명)이 시베리아-극동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소규모로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즉 모스크바를 비롯한 유럽러시아 지방에 926명, 우크라이나 및 백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에 106명, 중앙아시아 지역에도 81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로 극동 지방에 밀집되었던 고려인들은 영토상의 자치지역을 얻어내려는 움직임과 소련 당국의 인위적인 이주조치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다. 한명세는 1922년에 고려인자치구로서 포시에트 지구를 당국에 건의하였으나 1925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이를 기각하였다. 1927년에도 포시에트 고려인자치구 계획이 세워졌으나 실행되지 못 하였다. 오히려 소련 당국은 같은 해에 포시에트와 우수리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토지 미보유 고려인들을 3년에 걸쳐 내륙 지방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듬해에 폐기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하바롭스크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이 또 다시 등장하였는데 이듬해인 1929년에 13,287명의 고려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만주나 조선으로 떠나갔다. 한편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초대받아 이주해 간 한인들도 있었다. 1928년에 오가이 P. V. 와 안병화를 비롯한 70가구 약 300명에 이르는 극동의 고려인들이 카자흐자치공화국 탈디쿠르간 군으로 벼농사 재배를 위하여 초청 이주되었다. 이들은 농업조합인 ‘카즈리스’를 조직하고 벼농사 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또 다시 1933년에 러시아 남부의 로스토프-나-도누의 슬라뱐스크 군에서 벼재배를 시도하였는데 이때 조직된 조합이 ‘돈리스’였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남부 곡창지대의 벼농사에 극동의 한인들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30년대 소련의 국내정치적 상황은 고려인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나타났다. 이 시기에 악명높은 스탈린의 정치탄압과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및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조치가 실행되었던 것이다. 강제이주와 관련하여 소련 당국은 1935년 4월에 서북부 지역인 카렐리아 자치공화국의 소수 민족 1,000가구를 타지크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그리고 약 316가구를 서시베리아 지방으로 강제이주 조치하였다. 그리고 1937년 8월 21일자 스탈린의 명령으로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 전원에 대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전면적인 강제이주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1937년 9월 21일부터 그해 말까지 약 172,000명의 소련 극동주 고려인들이 기존의 터전을 잃고 대부분은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집단 이주되었고,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이주된 고려인들 중 일부는 키르기즈 및 타지크 공화국으로 이주되었다. 그리고 카자흐 공화국으로 이주된 고려인들 중 일부는 러시아 공화국의 아스트라한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소련 극동주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집행되기 직전 소련 당국은 고려인지도자 2,500 여명을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정치적 탄압을 실행하였다. 정치탄압의 대상은 비단 고려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과거 러시아 혁명에 기여한 고려인들과 지방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부당하게 체포당함으로써 기성 엘리트 고려인들의 몰락을 야기하였다. 부당한 강제이주에 대해 항거할 수 있는 고려인 지도층이 탄압받은 것은 소련 당국의 주도면밀한 계획과도 일치하는 일이었다.
강제이주 사건 이후 대다수 소련 고려인들의 생활거주지는 더 이상 극동 지역이 아니라 중앙아시아(특히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 지역으로 되었다. 중앙아시아 이주 한인들은 공화국 간 자유로운 이주도 제한받는 사실상의 특별이주민으로 취급받았다. 더구나 이 시기에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하고 나아가 중국 본토를 침략함으로써 소련 당국을 안보적으로 긴장시켰다. 러시아 혁명 직후의 내전기에 일본군은 극동과 시베리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바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안보적 긴장감은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일본인과 외모가 유사한 고려인들은 소련 내에서 경계대상 소수민족으로 취급당했던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은 절반 이상이 농촌의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에 배치되었고, 나머지는 도시의 공장노동자 및 사무원 종사자로 배치되었다. 1941년에 소련과 독일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고려인들은 주로 후방에서 지원활동을 하는 노동군(노무부대)에 편성되어 원료 채굴과 같은 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고, 직접적인 전투참가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일부 고려인들은 현역 군인으로 참전하여 소련의 승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의 구성원이었던 고려인들은 뛰어난 역량으로 인하여 점차적으로 소련 내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주로 벼농사와 면화농사에 치중한 고려인들의 집단농장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으며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훈장을 받은 고려인들도209명에 이른다.
한편 1945년에 남사할린이 소련에 재편입되면서 그곳에 잔류하던 43,000 여명의 한인들이 소련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징용된 사람들과 그 가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대륙의 소련 고려인들과 역사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에는 고국인 한국으로 귀환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할린 한인들의 송환 여부문제와 함께 소련 당국에 등장한 문제는 바로 북한 정권을 지원하기 위한 소련 고려인들의 북한 파견 문제였다. 실제로 소련에 거주하던 고려인들 중 일부가 차출되어 북한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하였는데, 가령 한국전쟁 정전회담 당시 북한 대표인 남일 장군은 바로 고려인이었다.
이제 소련 한인의 구성은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이주하여 생활 기반을 잡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태어나 살았고 1937년에 강제이주를 당한 사람들 및 지리적으로 시베리아 이서 지방에 거주한 덕분에 강제이주를 당하지 않은 사람들, 이들을 이른바 ‘고려인’이라고 한다면, 일본에 의하여 강제징용된 사할린 한인 등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이들 모두를 크게 보면 소련(소비에트) 한인이라고 지칭할 수 있다.
스탈린 사후인 1956년부터 소련 한인들에 대한 거주이전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치적 복권도 실행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남부 그리고 극동 지역으로까지 새롭게 이주하는 한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미 고려인들은 김병화, 황만금 등 콜호즈(집단농장) 회장에서 보여 지듯 뛰어난 농업생산가들로 소련 사회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소련 한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한·소 수교 그리고 연방해체에 따르는 새로운 국가의 성립과정의 짧은 시기에 결정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우선 소련 한인들은 ‘역사적 조국’으로 인식하던 한국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되고, 한국인들과 직접적인 접촉도 하게 되었으며, 직접 한국을 방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연방의 경우 1993년에 러시아 고려인의 복권에 대한 법령이 최고회의에서 통과됨으로써 완전한 명예회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인들의 협회 및 단체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 소련 때에는 한 국민이었지만 1992년부터는 소련이 15개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되었기 때문에 여러 국가의 국민으로 나누어지고, 그 결과 의도하지 않게 이산가족 현상이 발생하였다. 체제전환으로 인하여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게 된 한인들이 한국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되면서 소련 한인들에 대한 왜곡된 인상을 남겨 주기도 하였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재이주해 가는 고려인들은 대개의 경우 경제적인 약자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쨌든 소련의 와해와 함께 소련 한인은 용어부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그들 자신이 부르는 고려사람 또는 고려인이 그것이었다. 굳이 수식어를 더 붙이면 러시아 고려인, 카자흐스탄 고려인,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등으로 불려 질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고려인들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사할린 한인과 용어에서 차이난다.
고려인들은 혈연적, 문화적으로는 분명히 남북한 사람들과 공통적이지만 단지 언어적으로는 러시아어에 동화된 사람들이다. 물론 사할린 한인들의 새로운 세대들도 언어적으로는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한다. 그렇다면 현재 러시아어를 국어로 하지 않는 국가들에서는 어떠할까? 가령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고려사람들은 언어적으로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하지만 현지 주류 민족의 언어를 도외시 할 수 없다. 이 점이 바로 현재 고려인들이 안고 있는 언어문제인 것이다.
1990년대부터 이러한 언어문제 외에 고려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등장한 것은 많다. 우선 모든 민족에게 해당하지만 새로운 체제변화에 적응해야만 하는 즉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상황에서 경제적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비즈니스 분야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고려인들이 등장하였다. 과거 소련 시기에는 농업 분야에 높은 명성을 가졌던 고려인들의 새로운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 능력이 떨어진 고려인들은 후진적 삶을 면치 못하였고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뛰어난 경제상을 목도한 고려인들은 역사적 조국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같은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거주 국가 고려인들의 위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에 대한 균형적 시각을 가진 고려인들이 많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그러나 한국인 사업가들과의 만남을 가지고 일부는 피고용인으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고려인과 한국인들과의 정서적 갈등 또한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고려인들이 가지는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긍정적 이미지는 청년 세대 고려인들의 한국어 배우기와 한국 유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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