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월 고려인생활사 전시중에서
- 아래 내용은 고려인 박선복이 2005.1.18일 이순면 가족 이야기를 법원에 제출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
저, 한인 박선복은 1919.3.19일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포시에트 드보이노예에서
출생하여, 현재 타쉬켄트 양기율 타쉬켄트쇼흐 30, 36호에
거주하며, 여권 발급은 CB 1311763 타쉬켄트 샤하르
양기율 입니다.
1937년 8월 21일자
소연방 및 ЦК
ВКБ(б) СНК 에 의거 카자흐스탄으로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많은 고려인과 함께 그리고
같은 마을의 1907 출생 이순면, 1910년생 그의 아내
이천지와도 함께 이주되었습니다.
1937년까지 저희는 연해주 포시에트 드보이노예 마을에서 일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통보도 없이 블라디보스톡으로 보내졌고 9월 말 10월
초쯤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함) 화물칸에 실려 서쪽으로
이주 됬습니다. 길은 멀고 험했고, 화물칸은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로 꽉 채워졌습니다. 추위와 위생시설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기차가 잠깐 정차하는 동안 짐처럼 내려졌고 그 이상 아무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어디로 보내지는지 왜 보내는지 물어볼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이순면의 딸은
이주 도중 죽었고 묻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느 역에선가 열차에서 내려졌습니다.
그 때 가장 맛있게 먹었던 건 끓인 물이었습니다 (끓인 물 조차 자주 먹을 수 없었고 먹을 물도 땔 것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작은아이들은
부모의 입김으로 몸을 뎁혔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1달 가량 갔습니다. 날씨는 추워졌고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더 많이 죽었습니다. 카자흐스탄 국경을 지나서 가족 관계를 고려치
않고 일정의 사람들이 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카자흐스탄에서 이순면의 형제 자매들을 잃어버렸고
저의 누나는 이주 길 출산으로 죽었습니다.
통역해줄 사람도
행선지를 알려주는 사람도 없이 역에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각자 할 수 있을 만큼 살아남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 피난처를 마련해주고 도와줬던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여러 역으로 나눠서 우리를 흩었고 이순면과 그 가족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1953년에서야 우리는 양기율에서 만났고 큰 기쁨을 느끼며 살아남아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습니다.
1953년부터 다시 이웃에 살았고 이순면이 죽고(1980년), 그의 아내가 (1988년) 죽기까지
양기율에 같이 살았습니다. 두 사람은 양기율에 묻혔고, 4명의
딸을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