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머슴 출신이어서 주류로부터 외면당했고,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지워졌던 홍범도. 그는 카자흐 황무지에서 움막 생활을 하다가 1938년 크질오르다로 이주해, 병원 경비, 극장 수위로 근무하며 말년을 보냈다. 1943년 10월 벗들을 불러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요즘 관변과 보수언론이 열을 내고 있는 영화 <연평해전>선전을 보자니, 홍범도의 투쟁이 더욱 한스럽다. 크질오르다 중앙공원묘지에 묻힌 그는 지금도 유해로나마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여천 70주기 기념식을 주관했다. 현지의 한인들은 공식행사 뒤 답례로 연극 <홍범도 장군>을 공연했다. 배우들의 함경도 사투리는 유창했고, 극중 의병의 의기와 꿈은 눈물겨웠다. 관객들은 105년 전 함경도 삼수갑산, 의병 전장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이렇게 돌베개를 베고 바람을 덮고 밤을 지내지만, 만백성이 흘린 눈물이 봄날의 홍수가 되어 나려밀 때면 어즈러운 덤불들은 바다 속 깊이 무칠 것입니다. 어머니는 맨발로 달려나와 우리를 부득혀 안고 락루하실 것이지요.” “일남아, (아주 훗날) 아해들이 너에게 달려와 무릎 꿇고 ‘의병에 다니셨지요?’ ‘의병대장 홍범도를 아십니까?’ 저마다 물으면 너는 사자와 같이 머리를 높이 들고 이야기를 들려줄 터이고, 그 이야기는 그들의 노래가 되어 천대만대로 떨칠 것이다.”
기념사업회는 지난달 7일 다시 중국 투먼(도문)시 수남촌에서 봉오동 전투 95주년 기념식을 하고 전적지를 찾았다. “두만강을 건너온 일본군 추격대는 후안산을 거쳐, 저기 고려령의 산기슭을 돌아 이곳으로 오게 됩니다. 그들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뒤 저기 장달리 고개를 넘어 봉오동으로 갑니다.”
김철수 연변대 교수가 남봉오동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산과 구릉, 숲과 들뿐이었다. 크질오르다에서 여천의 삶과 투쟁을 경험했던 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상상의 날개를 펴는 듯했지만, 막연히 ‘홍범도’ 세 글자만 아는 이들에게 산천은 그저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봉오골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입은 거대한 댐으로 막혀 있고, 봉오동은 모두 수장돼 있었다. “여기서 10㎞쯤 더 들어가야 전투 현장입니다. 봉오골은 하·중·상동 마을로 되어 있습니다. 일본군은 저기 오른쪽 능선 노루목을 넘어 봉오골로 진입합니다.” 수남촌 촌장은 열심히 설명했지만, 보이는 건 길고 긴 호수의 잔물결뿐이었다. 그렇게 봉오동 전투의 기억들은 알뜰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홍범도.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동냥젖으로 키운 아이. 9살 땐 부친마저 여의고, 철들 무렵부터 머슴살이를 했던 소년. 평양의 친군서영에 나팔수로 입대해 명사수로 날리다가 난폭한 상관을 두들겨 패고 탈영했고, 제지공장에 들어가서도 폭력적인 사장을 두들겨 패고 금강산 신계사에 절 머슴으로 들어갔다가, 한 비구니를 만나 사랑을 맺은, 피가 뜨거운 청년. 불량배들을 만나 아내와 생이별하고, ‘을미의병’이 되어 일본 군경, 친일파들을 처단하다가 5년여 만에 아내와 재회했지만, 1907년 정미사변과 함께 본격화한 조직적 항일투쟁 속에서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불행한 남자.
신돌석 장군과 함께 거의 유일한 평민 출신 의병장. 1907년 11월 일본군 30여명을 사살한 후치령 전투 이후 1년 남짓 60여차례의 교전을 벌이면서 단 한번도 패한 적 없는 의병사의 전설.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고 하여 일본군조차 외경했지만 지금 이 나라의 의병사에선 자취가 거의 지워진 인물.
도저히 그를 잡거나 사살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부인과 맏아들을 잡아들여 귀순공작을 벌이려 했고, (투항 권고문을 쓰라는 요구에)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영웅호걸이, 아낙네가 이같이 어리석은 글을 쓴다고 굴복하리라 믿는가!” 오히려 호통을 치다가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아내. 그로부터 1개월 뒤 1908년 6월 함흥수비대와 교전 중에 전사한 큰아들 양순. 그럼에도 오히려 무장투쟁의 의지를 더 다졌던 사람.
일본군 정보기관의 평가는 이랬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서, 배하의 자들로부터 하느님처럼 숭배를 받”았다. 그 이유는 “사람 됨됨이가 소박하고 성실하며 청렴하고 명예를 탐하지 않았고, 대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몸을 굽히는 것을 꺼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연변 사학자 송우혜) 그는 “언제나 계급장도 없는 졸병과 같은 차림이었고, ‘왜놈이 아니라 제 동료를 잡는 데 쓰이는’ 지휘도나 권총 대신 왜놈 잡을 장총 두 자루를 지니고 다녔다.”(여천의 참모 홍상표)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4일 새벽 홍범도 부대가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의 일본 헌병순찰대를 파괴하면서 시작됐다. 일본군은 남양수비대 소속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월경 추격대를 편성해 뒤쫓다가 삼둔자에 매복해 있던 홍범도 부대에 섬멸을 당한다. 함경도 나남의 일본군 19사단은 대규모 토벌대를 편성해 근거지 파괴 작전에 착수한다.
봉오골 상동은 삿갓을 뒤집어 놓은 지형. 여천은 사방의 산기슭에 부대를 매복시키고, 이화일 부대로 하여금 토벌대를 유인하도록 했다. 의도대로 일본군이 삿갓 안으로 들어오자, 사방에서 사격을 퍼부었고, 일본군은 3시간 만에 사망자 157명을 포함해 사상자 500여명을 남기고 비파동 쪽으로 도망쳤다. 임진전쟁 때 이순신, 권율 장군이 거둔 대첩 이후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첫 대승이었다.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의 예고편이기도 했다.
청산리 전투에 대한 일본 정보기관의 보고는 이랬다. “10월 하순 고도구 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 군대에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박창욱 연변대 교수의 평가는 이렇다. “김좌진 부대는 백운평 전투, 천수평 및 어랑촌 전투 외에는 특별한 다른 활약이 없었다. 반면 홍범도 연합부대는 완루구, 어랑촌, 대굼창, 천보산, 맹개골, 고동하 등 나머지 전투를 주도했다. 적들은 37여단장 아즈마 소장이 직접 지휘하는 보병 주력과 이이쓰가 부대, 27연대의 주력을 동원해 홍범도 부대를 공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전력은 강했지만, 수백리를 강행군해 청산리에 도착한 직후였고,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반면 홍범도 부대는 9월 하순 가장 먼저 도착해 전투에 대비했다.”(장세윤 박사)
청산리 전적지도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장 박사가 아무리 손짓 발짓 하며 설명해도 그저 산과 구릉뿐이었다. 그때 그 함성, 그들이 흘린 피, 눈물의 망향가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청산촌 앞 동산의 거대한 기념비만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그렇게 묻혀지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건 여천의 조국에서 이루어진 말소와 왜곡. 김좌진의 참모였고, 이승만 정권의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은 저서 <우등불>에서 여천을 아예 독불장군이거나 도망자로 묘사했다. 일본군이 노획한 무기는 모두 홍범도 부대의 것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것이 이 땅의 정설이 되었다.
머슴 출신이어서 주류로부터 외면을 당했고, 청산리 대첩 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지워졌던 여천. 그러나 그가 1922년 입당한 것은 당시 적군만이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우고 군수품을 지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엔 그랬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이 끝나자 적군은 조선 독립군을 내팽개쳤다. “붉은 당에 의해 해산된 수만의 한인 군인들은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고, 중국으로 출경을 허락하지 않아 풍천설지에서 얼어 죽은 귀신들이 되었다.”(일제의 정보 보고) 게다가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인을 적성민족으로 낙인찍어 1937년 10월부터 11월까지 17만명 이상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여천은 카자흐스탄 황무지에서 움막 생활을 하다가 1938년 크질오르다로 이주해, 병원 경비, 극장 수위로 근무하며 말년을 보냈다. 1943년 10월 벗들을 불러 돼지를 잡아 대접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10월25일 눈을 감았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조국 독립이라는 소지 관철에 분투함으로써, 우리 독립을 최후까지 외치다가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봉오동 전투 주민 환영식에서)던 각오와 꿈도 접었다.
요즘 관변과 보수언론이 열을 내고 있는 영화 <연평해전> 선전을 보자니, 여천의 투쟁이 더욱 한스럽다. 크질오르다 중앙공원묘지에 묻힌 그는 지금도 유해로나마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