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고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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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약 50만 명 |
거점 |
우즈베키스탄: 176,000[1] 러시아: 108,000 카자흐스탄: 80,000
키르기스스탄: 15,000 우크라이나: 13,000 타지키스탄: 6,000 투르크메니스탄: 3,000 |
언어 |
고려말(한국어), 러시아어 |
종교 |
정교회, 불교, 유교, 기타 종교 |
관련민족 |
한민족, 한국인, 사할린 한민족 |
고려인(高麗人) 또는 고려 사람(러시아어: _ xml_:lang="utf-8" lang="ru">Корё сарам 코료 사람[*])또는 한국계 러시아인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의 독립 국가 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던 옛 나라인 고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흔히 까레이스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원래 고려인은 중국,일본 등 나라의 동포들과 같이 조선인이라고 했지만 자신들을 고려인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기 시작한것은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1988년 6월 전소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였다. 그러다가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 대표자 회의에서 정식으로 소련 조선인의 명칭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려인은 원래 조선인이라고 불렀지만 그뒤 소련의 정세가 급변하여 한국과 소련이 외교관계를 맺고 또 그곳 조선인들속에 점차 잘사는 한국의 형상이 부각되면서 대한민국에서 꺼려하는 '조선인'이라는 호칭을 정정해야 겠다는 생각에서 부터였다. 그런데 '조선인'이라고 하자니 한국에서 꺼려하고 '한국인'이라고 하자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감정도 고려하여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려인'이라는 기발한 착상의 신조어를 만들어낸것이다. 그들은 조선사람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닌 소련 사람이고 또한 자신의 언어와 문화도 일세기이상 지나는 동안 이미 남과 북과는 이질적인 소련의 특성을 많이 띠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의것과도 다른 자신들만의 특수한 독자적특성을 이어왔으니 그 어느 쪽도 아닌 '고려인'이라고 하는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한반도의 분열이 낳은 특수한 역사의 산물인것이다.한민족이 둘로 갈라진 비극은 호칭문제에서까지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이들 국가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이 포함된다.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부근, 코카서스, 남부 우크라이나에도 많은 고려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 공동체는 19세기 말의 극동 러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에 기원한다.
극동 러시아와 시베리아 이주[편집]
1800년대의 조선은 국정이 혼란하여 소수의 양반들이 대다수의 토지를 독점하게 된다. 가난한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이주하였는데, 청나라가 국경을 막고 있어서 러시아로 이주하게 되었다. 1863년 함경북도 경원 출신 60여 명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 지신허 마을에 정착했다.[2] 이후 많은 농민들이 시베리아로 이주하였고, 1800년대 말에는 그 수가 급증하여 1869년에는 조선인이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의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기 이전에 극동 러시아의 조선인은 러시아인보다 많았으며, 지방 관리는 그들에게 귀화를 종용하였다. 1897년의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전체에서 조선말을 하는 사람들이 26,005명(남자 16,225, 여자 9,780)이었고[3], 1902년에는 32,000명을 넘었다. 여러 도시에 고려인 마을과 고려인 농장이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러시아와 조선 모두 일본과 대립하였다. 하지만, 1907년 러일 전쟁이 종료되면서 일본의 요청에 의해 조선인을 배척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이로부터 조선인의 농장은 몰수되고 조선인 노동자는 해고되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조선의 독립 운동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로 피신하였다. 10월 혁명과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의 성장과 함께, 시베리아는 재소련 조선인의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터전이 되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인 조선의 지도자들이 3·1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 마을은 군대의 보충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1920년 3월 12일에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일본군과 하얀 군대를 전멸시켰다.[4][5] 1920년 4월 4일에는 일본군이 신한촌을 공격하여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러시아 문화에 상당히 적응을 한다.[6] 무엇보다도 그들의 땅에서 수탈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이주의 가장 큰 이유였다.
강제 이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인의 강제 이주입니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명목이었다.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추방되고 유배되었고, 이주 도중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고려인이 중앙 아시아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주민들은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한국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는 한국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구소련 붕괴 이후[편집]
연구에 따르면, 2002년에 약 470,000명의 고려인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며, 그중 198,000명이 우즈베키스탄에, 125,000명이 러시아, 105,000명이 카자흐스탄, 19,000명이 키르기즈스탄, 12,000명이 우크라이나, 6,000명이 타지키스탄, 3,000명이 투르크메니스탄, 5,000명이 기타 지역에 살고 있다.[1]
러시아[편집]
2002년의 인구 조사에서는 148,556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며, 남자가 75,835명, 여자가 72,721명이었다. 그중 1/4 정도는 시베리아와 극동 러시아에 거주한다. 그곳의 고려인들은 그 이주 경로가 다양하여, 1937년 선대의 강제 이주로부터 돌아온 독립국가연합 국적의 33,000명 외에, 약 4,000~12,000명의 북조선 이민자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이나 중국 소수 민족 출신의 고려인 또한 정착, 투자하며, 국경 무역에 참여하고 있다.
유럽 및 기타 지역[편집]
우크라이나의 2001년 인구 조사에서 12,711명이 스스로 고려인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는 1989년의 8,669명보다 증가한 것이다. 가장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하르키우, 키예프, 오데사, 니콜라에프, 체르카시, 르부프, 루한스크, 도네츠크,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자포로제, 크리미아 등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사회는 하르키우에 위치하는데, 약 150명의 한인 가족들이 거주한다. 최초의 한국어 학교가 1996년 이들의 관리하에 개교하였다.
한편 2014년 크림반도가 러시아로 편입됨에 따라 이 지역에 살던 약 3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 아시아[편집]
중앙 아시아의 고려인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문화는 이전의 수도였던 알마티(Almaty)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어 신문(고려 신문)과 한국어 극장이 운영된다. 카자흐스탄의 인구 조사에서는 1939년 96,500명의 고려인이 기록되었고, 1959년에는 74,000명, 1970년에는 81,600명, 1989년에는 100,700명, 1999년에는 99,700명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농촌 지역에 넓게 흩어져 있다.
무국적 고려인[편집]
구 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구 소련 시절 연방이었던 나라들이 러시아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국적을 다시 신청해야 하는데, 이를 몰랐거나, 서류를 분실하거나, 거주자로 등록하지 않았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등으로 신청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교육을 비롯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7][8][9]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10] 구 소련 지역에는 현재 전체 고려인의 10%에 해당하는 약 5만의 무국적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최근 한국 대사관의 신분 증명이 있다면 자국 내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 회복을 지원해 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11][12]
한국에의 회귀[편집]
약 1만 명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대한민국으로 귀화하였다.
중앙 아시아로의 이주 후, 고려인들은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른 양식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관개 시설을 만들고 지역 일대의 쌀 재배 농가가 되었다. 주변의 유목민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으며,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고려인들은 곧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지 않게 되었지만, 중앙 아시아인들의 옷보다는 서구의 복식을 채택하였다. 한국당근과 같은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사용 언어[편집]
1세대 까지는 한국어(고려말)를 쓰고 있다. 이들이 쓰는 고려말은 고려인들의 한국어나 중앙아시아 한국어를 사용하며, 러시아어와 중앙 아시아의 민족 언어, 우크라이나어까지 섞인 말을 쓴다. 그러나 2세대 후부터는 러시아어만 알고 고려말은 모르는 고려인들이 대부분이다. 고려인 중에도 일부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관련 항목[편집]
- ↑ 이동: 가 나 기광서, 「구 소련 한인사회의 역사적 변천과 현실」, 《Proceedings of 2002 Conference of the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Overseas Koreans (ASOK)》,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Overseas Koreans, 2002.12.15
- 이동 ↑ 고려인들의 통일대장정, 《동아일보》, 2014.8.5.
- 이동 ↑ “Первая всеобщая перепись населения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1897 г. (General Population Census of the Russian Empire in 1897)”. Demoscope.ru. 2007년 5월 20일에 확인함.
- 이동 ↑ The destruction of Nikolayevks-on-Amur: An episode in the Russian civil war in the Far East, book review in the Cambridge University Press.
- 이동 ↑ Kim Young Sik, Ph.D. The Free City (Amur River – Hukgang) Incident The left-right confrontation in Korea – Its origin Association For Asian Research 11/13/2003
- 이동 ↑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살림출판사
- 이동 ↑ 한국방송 추적 60분 <신년 기획> 우크라이나 실태 보고 '국적 없는 고려인', 2006년 1월 4일자
- 이동 ↑ 〈강제 이주 70년 기획〉 우크라이나 무국적 고려인 실태 보고 "우리는 유령처럼 살고 있다" - 〈추적 60분〉, KBS, 2007.8.15.
- 이동 ↑ 무국적 고려인 <중> 빈곤층으로 전락한 고려인, 《중앙일보》, 2009.6.26.
- 이동 ↑ 무국적 고려인 <상> 무국적 해법 내놓은 우크라이나, 《중앙일보》, 2009.6.25.
- 이동 ↑ 우크라이나, 무국적 고통 고려인 5만 해법 내놨다, 《중앙일보》, 2009.6.25.
- 이동 ↑ 무국적 고려인 <하> 실태 조사 나서는 한국 정부, 《중앙일보》, 2009.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