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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5-23 21:00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를 회상하며-김호준<역사저널리스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3,706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를 회상하며

                   김   호   준 <역사저널리스트>

 

  올해는 러시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고려인은 150년 전부터 러시아 원동(극동)지역에 정착해 살던 한민족의 일원입니다. 1937년 8월 21일 독재자 스탈린은 연해주를 비롯한 원동 일대에 밀집해 살던 고려인 18만 명에게 일제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강제이주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려인들은 민족절멸의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녹슨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버려졌습니다. 그것은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였습니다. 조선말 기근과 망국으로 조국을 떠났어도 두만강 건너 러시아 땅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망향의 한을 달래던 고려인. 그들은 중앙아시아 이주로 인해 현대판 디아스포라로 전락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떠도는 유랑민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강제이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고려인이 희생되었는지는 오늘날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숙청, 기근, 질병 등으로 9,500명 이상이 사망했다는 설부터 최대 2만 5,000명이 사망했다는 설까지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고려인들은 소련이 자유화될 때까지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 채 가슴속 깊이 묻고 침묵의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고려인 강제이주는 해외한인이 겪은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상처이며 결코 지울 수 없는 통한의 역사입니다. 
 

  돌이켜 보면 강제이주는 돌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고려인을 원동의 국경지역에서 제거하려는 오랜 러시아 쇼비니즘의 폭거였습니다. 러시아는 차르시대 이래 고려인을 원동 안보에 해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의 연해주 정착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을 군사적으로 방어하는데 고려인을 받아들이지 않은 황화론적(黃禍論的) 사고가 문제였습니다. 그들 백인으로선 고려인과 일본인의 구별이 잘 안되었기 때문에 연해주 안보를 위해선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늘 염려해왔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고 소련과 일본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우수리지방에선 양측 군대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정세를 반영해 소련은 중국 국민당정부와 이해 8월 21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했습니다. 바로 이날 소련은 원동 고려인을 모두 중아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이 명령서는 고려인 강제이주의 목적을 ‘원동지방에서 일본첩자들의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략적으로  민감한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통제하기 어렵고 신뢰할 수 없는 적성(敵性)민족’으로 간주해 그들을 근거지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격리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고려인은 원동에서 잠재력을 지닌 성숙한 민족공동체를 70여 년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고가 있는 민족을 거주지에서 모조리 쫓아낸 것입니다. 설사 고려인 사회에 소수의 간첩이 있었다한들 주민 전체를 일거에 추방한 것은 명백한 민족탄압이자 잔혹한 인종청소였습니다. 
 

  강제이주에 앞서 스탈린 정권은 2,500여 명의 고려인 지도층을 투옥시켜 고려인 사회를 미증유의 집단적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주열차를 출발시켰습니다. 투옥된 고려인은 끔직한 고문을 당한 후 대부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며 촉망받던 지도자 김 아파나시, 고려인 빨치산부대 창설자 한창걸, 조선에서 망명해 고려문학을 이끈 작가 조명희 등이 이때 희생되었습니다. 후일 알려진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일제의 간첩으로서 관동군의 사주를 받아 연해주 일대를 소련으로부터 탈취하려는 무장폭동을 준비했다”는 날조된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숙청된 고려인이 간첩이라고 증명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스탈린 정권은 간첩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고려인의 민족적 저항의식을 거세한 것입니다.


강제이주경로.JPG
 

 

  고려인 강제이주는 전 과정이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이주 2~3일 전, 또는 1주일 전에 겨우 이동준비를 지시받았습니다. 이주 통보 후 고려인의 여행과 촌락 간 통신은 금지되었습니다. 최종 행선지가 통보되지 않아 이주민들은 다만 멀리 떠난다는 것과 출발 일자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당국은 단 1명의 이탈도 허용치 않았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퇴원시켜서, 복무 중인 군인은 제대시켜서 이주열차에 오르게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노인들은 조상 묘소를 찾아가 흙 한 줌 싸가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고려인 이주민을 태운 첫 수송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1937년 9월 9일 밤이었습니다. 이주명령이 떨어진지 20일만입니다. 원동에 사실상 추위가 시작된 때였습니다. 화물차 한 칸에 보통 2~3가구, 많게는 4가구가 탑승했습니다. 화물차는 출입문 좌우에 선반을 질러서 2층으로 만들어 4칸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가구에 한 칸씩 배정하고 가운데에 원형 난로를 설치해 각 집이 조리할 때 이용토록 했습니다. 열차에는 유리창 하나 없이 널빤지로 막은 문만 있었습니다. 문이 닫히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이주민들은 기차를 그냥 ‘검은 상자’라고 불렀습니다. 안에서 밖을 볼 수 없었고 밖에서는 기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열차가 달릴 때면 널빤지 사이로 찬바람이 매섭게 들이닥쳤습니다. 저녁이 되어 기온이 뚝 떨어지면 기차 안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준비해 간 며칠간의 식량이 떨어진 뒤부터는 기차가 서면 바로 물을 길러 달려갔습니다. 당국이 내준 이주비를 움켜쥐고 먹거리를 구하려 나서야 했습니다. 식량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 당국의 지시였습니다. 이주민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3~4주간을 시베리아 횡단열차 속에서 시달렸습니다. 먼 길에 지쳐 모두가 앓았습니다. 열차사고, 기근, 질병, 추위 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집단 발병이 많았던 어린이가 많이 사망했습니다. 열차가 서면 지명도 모르는 철길 근처에 시신을 서둘러 묻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주인 없는 시신은 밤에 열차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수송열차에 동승한 비밀경찰 요원들은 이른바 불순분자에 대한 체포를 계속했습니다. 강제이주와 숙청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1937년 10월 원동에는 더 이상 고려인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고려인을 태운 비극의 수송열차가 달려간 거리는 장장 6,000km, 이주민 수는 총 3만 6,442가구 17만 1,781명이었습니다. 그 중 9만 5,256명이 카자흐스탄에, 7만 6,525명이 우즈베키스탄에 각각 짐을 풀었습니다. 여기에 그 후 수송된 4,700여 명을 포함하면 강제 이주된 고려인 총수는 18만 명에 달합니다. 
 

  강제이주 후 원동의 농촌에서는 노동력 부족으로 추수를 못해 농작물이 들판에서 말라 죽었습니다. 거리에는 굶주린 집짐승들이 돌아다니며 행인들을 위협했습니다. 고려인 이주로 공동화된 지역에는 붉은 군대의 제대 장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빈집은 약탈당하고 불 태워졌습니다. 고려인들이 살던 원동의 444개 마을은 폐쇄되어 지도에서 영영 사라졌습니다. 강제이주는 1860년대 이래 고려인이 원동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쌓아올린 모든 성과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며 폭력적인 파괴행위였습니다. 공산제국 소련의 안보와 국가이익 앞에 소수민족의 삶과 인권을 깡그리 짓밟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스탈린정권은 강제이주를 ‘위대한 국가적 대사업’으로 찬양하면서도 극비리에 추진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반 국민은 물론 공무원들도 강제이주 사실을 몰랐습니다. 고려인 대변지로 자처하던 ‘선봉신문’은 강제이주에 대해 단 한 줄의 기사를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이주민 가운데 당시 상황을 사진으로 남긴 사람도 없습니다. 일제 치하 망국 조선의 백성들은 자기 동포가 낯선 곳으로 끌려가는 것조차 모르고 말 한마디 거들지 못했습니다. 지구촌은 침묵했습니다. 어느 국가, 어느 신문도 이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강제이주가 어찌나 은밀하게 진행되었던지 유럽의 민주진영이나 독일의 반공단체조차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항의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을 식민 통치하던 일제였습니다. 그들은 모스크바주재 대사관을 통해 ‘조선인은 소련에 거주하더라도 천황의 신민(臣民)’이라고 주장하며 이들의 안전에 대해 조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소련은 “소련시민인 고려인문제에 일본이 개입할 특권이 없다”며 단호하게 일축했습니다. 
 

  강제이주의 비극은 소련의 잔인한 대국주의 정책이 낳은 결과이지만 주된 원인은 일-소의 적대적 대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러-일전쟁 승리 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러시아조선인, 즉 고려인까지도 천황의 신민으로 간주해 부당한 간섭을 일삼았습니다. 일제는 고려인의 항일구국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러시아(소련)를 압박했고, 정탐활동에 고려인을 이용함으로써 고려인 불신과 소련의 안보불안을 부추겼습니다. 급기야 스탈린은 고려인 강제이주라는 전대미문의 폭거를 자행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인 강제이주의 비극은 일본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소 대립의 틈바귀에서 찢기고 짓밟힌 것이 나라 없는 백성 고려인이었습니다.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유배지(流配地)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고려인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벽지 10여 곳에 분산 배치되었습니다. 대부분이 농업이나 어업 콜호스에 거처가 정해졌습니다. 이곳에서도 고려인은 심한 정치적 탄압과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공민증은 회수당하고 향후 5년간 거주지가 제한된다는 검정 도장이 찍힌 신분증을 지녀야 했습니다. 거주지를 이탈할 경우 도망으로 간주해 처벌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 취업이 제한되고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서도 배제되었습니다. 고려인 자녀는 대도시 대학에서 입학원서를 받지 않았으며 전시에 군인으로 복무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인들은 비밀경찰의 엄중한 통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내륙에 갇힌 포로였습니다.  
 

  지도층에 대한 검거선풍도 계속되었습니다. 발틱함대 포병장 출신 최성학, 고려인문제 전권위원 김만겸, 이동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유배된 박정훈 등이 일제간첩이란 혐의로 카자흐스탄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비밀경찰이 갖가지 죄명으로 고려인 1,515명을 체포해 그중 1,321명을 처벌했습니다. 그 중에는 공소시효가 끝난 20년 전의 밀수행위까지 법정에 세워 수용소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크즐오르다 벽보신문에 ‘밭 갈던 아씨에게’라는 시를 발표한 강태수는 반동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아씨’는 단지 젊은 여성을 상징한 것이었지만 당국은 떠나온 연해주를 그리워하는 시적 이미지로 사용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강태수는 북극 원시림으로 보내져 21년간 옥살이의 고초를 겪었습니다. 이 필화사건 이후 고려인 작가들은 강제이주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어휘는 물론이고 원동, 조국, 고향 등에 대한 향수의 표현이나 소련의 제도·정책을 비판하는 어떤 종류의 글도 발표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인 작가들의 시는 새로운 조국과 새로운 고향에 대한 찬양일색으로 변했습니다. 소비에트 고려인 문단은 암흑기를 맞았습니다.  
 

  강제이주 직후인 1938년 초 고려인들은 당장 먹고 살 양식이 없었습니다. 봄이 오자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갈대숲을 베고 수로를 파서 논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보물처럼 싸가지고 온 볍씨를 심었습니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면 해가 지도록 논밭에서 일했습니다. 부모상을 당해서도 그 이튿날 눈물을 훔치며 일터로 나갔습니다. 갈대밭은 어느새 옥토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의 사막성 기후는 일조량이 풍부해 물만 충분히 주면 곡식과 채소가 잘 자랐습니다. 봄에 파종한 쌀, 콩, 밀은 그 해 가을에 좋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고려인들로 편성된 ‘북극성 콜호스’는 생산계획을 700% 달성했습니다. 다른 고려인 콜호스들도 생산계획을 수배씩 초과 달성했습니다. 1년 농사를 결산해보니 국가에서 빌려 쓴 빚을 갚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다음해에도 풍년을 맞아 고려인들은 이주 3년 만에 재기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은 고려인에게 기회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남자가 노동군으로 동원돼 일손과 농기구가 크게 부족한 속에서도 고려인 콜호스는 목화와 벼의 경작면적을 3.5~5배 이상 크게 늘렸습니다. 전선으로 보내는 식량이 많아지면서 곡물재배의 중심이었던 고려인 콜호스의 명성은 높아졌습니다. 카자흐스탄에 김만삼이 있었다면 우즈베키스탄에는 김병화가 있었습니다. ‘선봉 콜호스’를 이끈 김만삼은 세계 최고수준의 벼 수확량(ha당 17톤)을 올려 스탈린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북극성 콜호스’의 김병화는 300만 평의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전시 식량지원에 앞장서면서 북극성 콜호스를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키웠습니다.
 

  고려인은 손을 댄 작물에 무엇이든 인상 깊은 결과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목화, 황마 등의 재배 경험이 없었지만 경이적인 수확기록을 세워 수십 명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습니다. 전쟁 중 고려인들은 국방기금 모금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강제이주와 공포 속에 살던 고려인에게 전쟁은 두려움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전선으로 나가자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려인들은 도시에 들어와 살 수 있었습니다. 고려인들은 뛰어난 노동열정을 발휘하며 소련의 승리를 위해 헌신함으로써 소련정권은 물론 현지 주민들과 공존의 토대를 쌓아갔습니다. 
 

  고려인들은 생존과 미래를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노동과 자녀교육에 올인해 우수하고 근면한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노동은 기댈 데 없는 고려인이 이역에서 살아남고 지탱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교육은 적성민족의 멍에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추구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출구였습니다. 고려인은 탄압받은 상처의 치유수단으로 일과 공부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콜호스에서 고려인은 하루 15시간의 노동에 2시간 정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하루 8시간 노동이 원칙이었던 소프호스(국영농장) 농민과 비교할 때 엄청난 중노동이었습니다. 고려인들이 일벌레가 된 것은 강제이주의 악몽을 잊으려는 것과 무관치 않습니다. 그들은 적성민족이란 불신을 씻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 것만이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고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40년대~60년대 사이에 인구 30만 명의 고려인 사회는 총 201명의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배출했습니다. 민족구성원 비율로 볼 때 고려인 노동영웅 숫자가 소련 전체에서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강제이주 1세대는 자식에게 아픔이 물려질세라 밥을 굶어가며 자녀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고려인 가정에서 자녀의 대학진학은 당연한 일처럼 여겼습니다. “공부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다. 공부하다 죽더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고려인의 한결같은 절규였습니다. 그들의 치열한 교육열은 마침내 자녀들의 학력을 소련 내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고려인은 비로소 소련인민으로서 공민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거주의 자유와 함께 정치참여가 허용되고 최고학부와 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향학열에 불타던 젊은이들은 대도시 고등교육기관으로 돌진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소련 사회의 각 분야에서 고려인의 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고려인의 교육투자가 영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젊은이들이 농업에서부터 학자, 연구원, 교사, 의사, 건축가, 엔지니어, 법률가, 문화인, 공무원 등 다양한 전문 직종에 진입했습니다. 
 

  강제이주 후 반세기가 흐른 1989년, 고려인들의 직업구성을 보겠습니다. 55%가 교사, 의사, 기술자 등 전문직 종사자이며 30%가 노동자, 12%가 농민, 나머지 3%가 학생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85%가 도시 거주자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려인의 주류가 과거엔 농촌의 농민이었지만 50년 후 도시 거주 전문직·노동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농촌에 살던 하층 농업민족이 교육을 통해 직업전환에 성공함으로써 도시거주 중간관리 층으로 도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려인의 이러한 집단적 신분상승과 위상변화는 소련에선 극히 이례적입니다. 그들이 겪은 강제이주의 시련과 박해를 생각한다면 고려인의 성취는 가히 놀랄 만합니다. 농업신화를 엮어내며 다방면에서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 소련 제1의 소수민족으로 우뚝 선 것입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돌밭에 버려져도 꽃을 피우는 것이 고려인이다.” “소련에서 거지가 없는 민족은 고려인뿐이다.”라는 칭송을 받고 살았습니다. 
 

  역사적으로 고려인들은 도전정신이 강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시련을 기회로 만드는 창의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연해주를 개척해 옥토로 가꾼 주인공이 그들이었고, ‘유배지’ 중앙아시아에서도 그들의 개척정신은 대를 이어 빛났습니다. 소련붕괴 후 어느 민족보다 빠르게 시장경제에 적응하여 힘차게 재기하고 있는 것 역시 고려인입니다. 고려인은 지금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다하면서도 조국의 관심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그들의 손을 잡아준다면 그들은 다시 한 번 성공신화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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