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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02 10:42
알려지지 않은 일제의 만행, 4월 참변(신한촌 참변)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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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들을 학살한 후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 일본군

 4월 참변이란 적백내전의 말미에 철군을 위한 휴전을 틈타 무방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진주한 일본군이 당시 망명 한인들로 융성했고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던 신한촌 일대의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날을 이인섭 독립운동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애국자들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동지들을 추억하면서
조선민족해방을 위하여 백절불구하고 투쟁하다가 왜적들에게 학살을 당한 40주년을 제하여(1920년-1960년)

소련 중아시아에서 이인섭 1960년 조선해방 15주년을 맞으면서

조선민족 해방투쟁에서 열렬한 애국 열사이던 김이직·최재형·엄주필 동지들을 추억하면서. 잔인무도하게 일본군벌들에게 그들이 학살당한 40주년을 제하여.(1920-1960년)

Ⅰ.

1917년 10월 25일 (양 11월 7일)에 소련 공산당 영도 하에서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이 성공되자 이 지도상에는 무산자 독재주권인 소비에트 국가가 성립되었다.
  1918년 4월 5일이었다. 미제국주의자들을 선두로 한 영국·불란서(프랑스)·이태리(이탈리아)·일본 기타 외국 무장간섭자들이 원동 해삼[Владивосток(블라디보스토크)]항을 강점함으로써 원동에서도 국민전쟁(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 침략전쟁(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러시아 군대들에게 포로 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흰파[백파(백위파)]들과 같이 무기를 들고 소비에트 주권을 반하여서 외국 무장간섭군 선두에서 왜군들과 같이 발악하여 나섰다.
  볼셰비크당 호소에 응하여 노동자·농민 대중은 소비에트 조국을 옹호하기 위하여 적위군 대열에 자원적으로 참가하여 외국무장 간섭자들과 반역적 흰파(백위파)들에 반항하여 싸우게 되어 국민전쟁(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소련지대에 거주하던 조선인·중국인·마쟈리인·셀비인 기타 소수민족들도 합동 민족부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러시아 적위군들과 어깨를 같이 하고 우수리 전선에서 소비에트 주권을 옹호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수효 상으로 많지 못하고 중앙과 연락을 잃은 우리 적위군들은 수효 상으로 초월한 적군들과 방어전을 계속하며 차츰 Хабаровск(하바로프스크) 방향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1918년 9월 5일이었다. 우리는 군사혁명위원회 명령에 의하여 빨치산 전투로 넘어갔다. 필자는 당시 원동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외교부장이며 하바로프스크시 볼셰비크당 비서인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지도하에서 흑룡강 기선 “Барон-Корф(바론-코르프)”에 당 정부 주요문건을 가지고 г. Благовещенск(블라고베쉔스크)로 향하다가 중로에서 흰파(백위파)들에게 포로 되었다. 그러나 포로 시에 우리는 중요 문부들을 강물에 던지어서 원수들의 손에 아니 가게 되었다.
  1918년 9월 25일 (음력 8월 15일)에 당 소비에트 기관 지도간부들은 흰파(백위파) 칼미코프 악당들에게 희생을 당하였는데 그 중에는 А.П.김 Стакевич(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도 있다. 그는 당시 33년인 청춘 여사였다. 이 사변은 당시 러시아 볼셰비크당에와 나 어린 한인사회당에 막대한 손실이었다.
  이와 같은 만행으로써 외국 무장간섭자들은 나 어린 소비에트 주권을 없애려고 공산주의를 무장으로 탄압하려고 망상하고 발광하였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과 영·일(영국·일본) 기타 제국주의자들은 엄청나게도 오산하였었다.
  공산당 지도 아래서 각 전선에서 공작하던 적위군들은 시비리(시베리아)와 원동 산간 계곡들을 차지하고 빨치산 요새를 창설하고 전투를 계속하였다. 처음 100명에 지나지 아니하게 우수리 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였던 조선인 빨치산대들 외에도 연해주 수이푼 계곡, 수청 기타 지대에서 수많은 빨치산들이 공작하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후에 조선에서와 중령(중국령)에서 조선 애국자들이 찾아와서 어느 조선 빨치산부대에든지 조선과 중국에서 싸우는 빨치산들이 여러 천명으로 계산되었다.
  원동과 시비리(시베리아) 방방곡곡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전투가 맹렬히 계속되었다. 외국 무장 간섭자들과 흰파(백위파)들은 단지 철도변을 차지하였고 기타 지방 농촌, 삼림 계곡은 빨치산들이 비밀리에서 공작하는 군사혁명위원회 유일한 지시에 의하여 전투하였다.
  1919년 11월 14일이었다. 시비리(시베리아) Омск(옴스크) 도시에 소위 중앙정부라고 자칭하던 흰파(백위파) 콜차크 무리는 외국 무장간섭자들 총창에 의하여 잔인무도하게 발악하던 괴뢰가 붉은 군대 진공에 의하여 붕괴되고 옴스크는 해방되었다.
  콜차크 대장은 달아나다가 1920년 초에 г.Иркутск(이르쿠츠크)에서 우리 빨치산 부대들에게 포로가 되어서 혁명재판의 결정에 의하여 사형을 당함으로써 흰파(백위파) 콜차크 정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에 창황망조한 미(미국)·영(영국)·불(프랑스)·이태리(이탈리아)·가나다(캐나다) 등 무장 간섭군들은 창피스럽게도 철병하기 시작하여서 1920년 1월에서 4월 7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을 포함하여서 모두 철병하여 달아나고 다만 왜병들만 남아있었다.
  일본 군벌들은 “소비에트 주권은 공산주의니 원동에 그를 허용할 수 없어 아니 철병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소련 공산당에서는 일본과 직접 전쟁을 회피하기 위하여서 원동공화국(완충정부)을 조직하고 일본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로 착수하였다.
  왜군 당국은 중립을 선언하였고, 우리 빨치산들은 각 도시에 들어와서 병영에 배치되었다. 왜군 당국은 강화조약에 서명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Ⅱ.

1920년 4월 5일이었다. 이 날은 원동에서 국민전쟁(러시아 내전)이 시작된 지 만 2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또는 왜적들이 강화조약에 서명하겠노라고 약속한 날이었다. 그래서 우리 당국에서는 놈들이 배신하고 반란을 하리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안전 상태에 처하여 있었다.
  아침 9시 30분에 왜병들은 대포·기관포로 도시를 향하여 사격을 시작하여 전 시가는 불에 타기 시작하였고, 노인이나 여자나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집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왜군들 총창에 맞아 쓰러졌다.
  감옥에 갇히었던 흰파(백위파) 반역자들은 모두 석방되어서 전 시가는 혼란 상태에 처하였다. 해삼[Владивосток(블라디보스토크)]·소황령[소왕령, Ворошилов(보로쉴로프)]·스바스크·이만·하바로프스크 도시들에 거주하던 조선 남자들은 전부 왜놈들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차고 넘었다.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는 불에 타서 재무지로 변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수십 명 조선 빨치산들이 있었다. 체포되었던 조선인 애국지사들이나 놈들이 빨치산이라고, 공산주의자라고, 반일 운동자라고 의심하는 인사들은 모두 비밀리에서 잔인무도하게 학살을 당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한 평생을 직업적으로 조선을 해방하기 위하여 분투 공작하던 직업적 혁명 열사들인 최재형·엄주필·김이직 선진들이 계신 것이다. 그리하여 왜병들은 연해주에서 1922년 10월까지 소비에트 주권에 반항하여 만행을 계속하여 무수한 혁명자를 계속 학살하였다. 그래서 4월 5일은 언제든지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에 남아있다.…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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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독립운동의 대부 '페치카' 최재형 지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했습니다. 최재형 지사는 도피할 수 있었지만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순국의 길을 선택합니다. 최재형 지사의 최후에 대한 그의 가족들의 증언입니다.


"1920년 4월 5일이 시작되며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빠와 파벨은 일본 간섭군들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집을 떠나 있었다. 4월 4일 저녁에 아빠는 집에 돌아오셨는데, 우리 모두는 놀랐고, 아빠를 걱정했다. 거리에는 이미 어둠이 내렸다. 저녁 식사 후에 아빠는 엄마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를 불러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면 일본인들이 엄마와 너희 모두를 체포해 갈 것이고, 때리고 고문을 하면서 나를 내어 달라고 요구할 거야. 나는 이미 늙었고,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기에 죽어도 좋단다. 하지만 너희들은 더 살아가야 하고, 일을 해야 하잖니. 차라리 나 혼자 죽는 편이 더 낫단다.” 우리 모두는 울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와 작별을 나누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마도 아빠는 잠을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다.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그는 우리 방의 창 덧문을 열고 계셨다. 그 바람에 나는 누운 채로 잠에서 깨었다. 약 5분쯤 지난 후에 우리 방 쪽으로 문이 열렸고, 그 때 총을 든 일본군이 나타났다. 우리는 무슨 일인지를 알아채고 옷을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는 밖의 현관계단 쪽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빠의 뒷모습과 뒤로 묶인 아빠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이는 1920년 4월 5일 아침에 있었던 사건이다.
우리는 이 끔찍한 경험을 했다. 잡지에서 죽은 자를 보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나는 울기 시작했고,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거나 졸도를 한 적도 있었다. 일본놈(япошка)들이 아빠를 고문하고 죽였다는 생각은 평생 동안 나의 가슴을 찢어놓고 있다. 나의 신경은 약해졌고, 신경성으로 평생 고생하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아빠는 홀로 우리 가정의 부양자이셨고, 엄마는 8명의 아이들이 있는 대가족을 돌보고, 항상 있는 아빠의 손님들을 신경 써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좋은 주부였고 음식을 잘 만들었으며 바느질(뜨개질)을 아주 잘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 나는 엄마와 같이 살며 맏이 역할을 했는데, 아래로 4명의 동생들을 돌보았다. 우리는 먹어야 했고 배워야 했으며, 우리는 먹을거리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 최 올가 페트로브나의 증언


  1920년 4월 4일 저녁에서 5일 새벽에 그토록 우려했던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즉 새벽에 일본군들이 불시에 자고 있는 빨치산들을 기습했으며, 온 도시는 포 소리와 기관총 탄환 발사되는 소리에 휩싸였다. 일본군들은 정기적인 군사훈련이라는 구실 하에 낮에 이미 3-4명의 군인들이 전략적인 지점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군들로 하여금 빠르게 빨치산의 병영을 포위하고 자고 있는 빨치산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단지 하나의 부대인 공병부대만이 강한 저항을 할 수 있었다. 이 공병부대는 주로 도시와 주변 마을들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월 4일 저녁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대 클럽에서는 도시의 젊은이들이 참석하는 저녁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시에서 첫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때, 공병대대 전사들은 곧바로 병영 쪽으로 넘어갔으며, 사방 방어태세를 구축했다. 이것은 일본군들의 진격을 염두에 두고 준비된 것이었다. 기습해 들어 온 일본군의 첫 종대(부대)는 거의 완전히 궤멸을 당했다. 얼마 안 있어 일본군들은 빨치산들의 병영을 강습하기 위해 더 강한 부대를 급파했다. 하지만 이 부대 또한 많은 손실을 입고 물러서야 했다. 새벽녘에 일본군들은 포를 한 곳에 집결시키고 빨치산들의 병영을 향해 직접조준포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빨치산들의 사격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른 아침에 아빠는 집을 나가셨다. 우리는 그가 동지들과 만나서 그들과 함께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을 것으로 확신했다. 형 파벨(2남, П.П.Цой) 또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또한 아침 일찍 빨치산 부대와 함께 도시를 벗어난 상태였다. 나는 그날 이웃하고 있는 텃밭을 지나 바라노프스카야 거리 쪽으로 나가 보았다. 거리에는 일본군들과 장갑차 같은 전투기계장비들이 활발하게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그때 일단의 병사무리가 수레에서 자신들의 부상병이나 죽은 병사들을 골라내었고, 다른 병사들은 총검으로 때리고 숨통을 끊어 놓으며 부상당한 빨치산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아마도 일본군 지휘부는 자신의 병사들의 완전한 사살시행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는 일본군 지휘부로 하여금 자신의 병사들을 쇠사슬로 기관총에 묶도록 만들었다. 다리 옆 구석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옆에 두 명의 일본군 병사가 기관총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인민궁전의 공원에서는 일본군 병사들이 어떤 협의회나 대회(съезд) 참석을 위해 모인 대표단들을 잔인하게 다루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고 있지 않은 가운데 저녁 늦게 아빠께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빠의 말에 따르면 도시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빨치산들에게 즉시 떠나도록 엄마와 누나들은 아빠를 설득했다. 하지만 아빠는 단호하게 집을 떠나 몸을 숨기는 것을 거부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만일 내가 몸을 숨기면 일본군들은 엄마와 너희들에게 잔인한 징벌을 가할 거야. 나는 일본군들이 어떻게 아이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는지 보았고, 그들의 규율을 알고 있단다.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 속에 너희들의 목숨을 내 맡길 수는 없다. 나는 오래 살았고(그는 당시 60세였다), 이제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단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엄마는 우셨고, 우리 어린 자식들도 엄마와 함께 울었다. 이른 아침에 아이들은 이미 잠이 들어 있었고, 엄마는 마당으로 나가셨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비명소리와 함께 이웃여인이 우리 집 쪽으로 뛰어왔다. 그녀는 “일본군들이 할아버지(나의 아버지)를 잡아 갔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큰누나가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일본군 헌병들은 이미 자동차에 아버지를 싣고 떠나고 있었다.
  이날 200명이 넘는 한인들이 체포가 되었다. 저녁 무렵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 김이직(Ким Ли Тик), 엄주필(Эм Дю Фир), 황 카피톤 니콜라에비치(Хван Капитон Николавич)를 제외하고 심문 후에 대부분의 한인들은 석방되었다. 이 비극적인 4월참변 시기 동안에 연해주에서는 많은 러시아국적의 한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들은 러시아인들과 함께 소비에트 권력을 위해서 외국간섭군(иностранный интервент)들에 대항해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어머니와 여자형제들은 거의 반년동안 아빠의 생사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일본군 헌병대를 출입했다. 일본헌병대는 우리 가족의 예를 통해서 자신들의 잔인성을 보여주었다. 처음에 일본군들은 자신들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를 모르고, 그를 체포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들은 다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사실은 체포되었고, 일본으로 압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일본법정의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알렸다. 1920년 가을에 일본군들은 아버지께서 이미 그해 봄에 재판 후에 총살 되었고, 아버지의 시신은 내어줄 수 없다고 답해주었다. 1922년 여름에 인민혁명군(НРА, Народно-революционная Армия)) 정규부대의 공격으로 일본군들이 철수하기 시작했을 때, 일본군 헌병대관리국은 엄마를 불렀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해를 가져가라고 제의를 했다. 우리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일본군 첩보기관은 (거짓술수로) 우리 가족에게 다시 한번 일격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일본인들의 비겁한 행동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제의를 분명하게 거절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우리 가족은 결과적으로 아직까지도 아버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매장된 장소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일본군들은 체포된 사람들을 잔인하게 다루었었으며,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문과 조롱 후에 체포된 이튿날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와 그의 동지들은 불행하게도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 최 발렌틴의 증언


고려인들에게 4월 5일, 한식은 이처럼 역사의 아픔을 달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스탈린 치하에서 민족문화를 보존하기 힘든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집에서 몰래 차례를 지내며 먼저 떠나간 선조들을 기리곤 했습니다. 너머는 매년 한식을 맞아 고려인들과 함께 한식을 보내고 있습니다. 너머와 함께 아픈 역사를 생각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몸바친 우리 선조들을 함께 추모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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