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한 독립지사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막연히 우리 핏줄로만 여겨졌던 연해주 한인들의 자손들, 즉 고려인들에 대한 시각도 많이 교정됐다. 하지만 고려인 4세 보호를 위한 우리 정부의 정책이나 배려는 아직도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출입국관리 당국에 따르면 한국 땅에 와 있는 고려인은 약 7만명. 이들이 데려온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약 8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원래 정착지였던 연해주에서 쫓겨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삶을 일궈왔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중국의 조선족과는 달리, 우리 말을 거의 하지 못해 주로 중소규모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려인이 몰려 사는 지역은 대개 공장지역 인근이다.
수도권 내 고려인 최대 밀집 지역은 ‘땟골’이라 불리는 경기 안산시 선부동이다. 그리고 전라도 광주가 있고, 인천 연수구 연수동 함박마을이 있다. 함박마을에 고려인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2017년쯤. 고려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안산에서 고려인 정착을 도왔던 지원단체 '고려인너머'가 함박마을에 '고려인문화원'을 세웠다. '고려인너머'는 지난 2010년 만들어진 단체이니, 7~8년만에 인천에 분원을 세운 셈이다.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에 사는 고려인은 약 6000여명으로 추정된다. 함박마을 전체 주민의 절반에 이를 정도다. 다행하게도 이 곳은 약 20년 전 구획 정리가 끝내고 신도시로 조성한 탓에 생각한 것보다는 거리도 깨끗하고 조용하다.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와 식당, 빵집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당근김치'로 불리는 당근 채무침과 같은 반찬과 딱딱한 빵, 치즈 등을 파는 식료품점이 먼저 눈에 띈다. 이곳에서는 빵을 한국의 빵집과 달리 썰지 않은 채로 판다. 우리가 선호하는 달콤한(?) 빵과도 차원이 다르다. 주식이다 보니, 밀도가 높고 딱딱하다.
돼지고기·쇠고기 소시지와 치즈도 다양하게 진열돼 있다. '깔바사'라고 불리러시아식 소시지 등 소시지류와 햄·치즈는 모두 러시아 땅에서 들여온 것들이다. 그들의 '국민 간식'인 해바라기씨와 해바라기씨로 만든 과자, 그리고 보드카는 이 지역 최고 인기 상품이다.
함박마을 노래방에는 간판이 따로 없다. 그래도 다들 알고서 찾아와 스트레스를 푼다. 노래는 당연히 러시아 노래다. 파티도 러시아식으로 즐긴다. 사는 곳은 한국 땅이지만, 오랜 세월 젖어온 문화와 습관을 쉬 버리지 못한 탓이다.
특히 우리와 다른 문화는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파티다. 그날 저녁 고려인 레스토랑에는 여성 손님들로 가득 찼다. 여성들에게 선물로 인기만점이 꽃 가게도 호황을 누렸다. 한국속의 러시아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장면이다.
함박마을 월세는 대략 30만~45만원. 대신 보증금이 없어 몫돈이 없는 고려인들이 모여드는 데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한다. 함박마을엔 원래 중국 조선족과 중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살았다. 주변 한국사람들이 이 곳에 발을 잘 디디려고 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고려인들이 몰려들면서 고려인문화원을 중심으로 자체 ‘순찰대’도 만들고 청소도 함께 하면서 '살기좋은 마을' '아이들이 안전한 마을'로 변하기 시작했다. 구청에서도 컴컴한 골목에 가로등을 추가로 설치했다. 이같은 노력은 범죄율을 지난해 대비 70%나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고려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은 고려인문화원 측이 맡는다. 고려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수업'을 진행하면서 한글을 익히도록 도움을 준다. 학교에서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만 있다면 아이들도 학교를 가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곳에서 계속 뿌리를 내리고 살려고 한다면 꼭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가 고려인 4세에게도 한국 정착이 가능하도록 특별법을 제정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