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그들이 귀환하였다.

할아버지는 강원도에서 살다가 함경도로 갔대요. 함경도에서 할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연해주로 갔고요.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거 찾으러 갔대요. 연해주에서 아버지 낳고 사는데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어서 거기에 살았지요. 저도 1956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다시 러시아로 갔는데 2년 전에 딸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와서 나는 1년 전에 손녀 봐주러 왔어요. 할아버지 고향에 왔으니 이제 여기서 살아야지. (김 할머니, 2019.05)

김 할머니의 구술에서처럼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는 진행형이다.
고려인의 이주 흔적은 18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연해주에서 시작된다. 구한말 13세대가 빈곤과 굶주림, 그리고 착취를 피하여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작된 고려인이 최근 우리사회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 이들은 허허벌판 황무지를 일구어 옥토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 일대를 대한의 사람들이 항일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 사는 땅으로 만든 후손들이다. 예컨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크라이나 등에 거주하던 한민족이다.

 

출처: 우수리강(江) 유역의 최초의 고려인(한국이민사박물관, 2014)

고려인동포가 한국 내에서 동포지위를 보장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1999년 9월 제정)이 개정된 2004년 3월 이후부터이다. 특히 2007년 H2 비자의 시행으로 고려인동포의 한국행 노동이주가 매우 증가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CIS지역의 경제 불황과 한국기업의 진출, 한국의 대중문화 유입, 선교사들의 활동 등을 통해 ‘동포로서의 기대’ 감정이 한국을 찾게 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명 고려인이라 불리는 러시아・CIS 동포들은 한국인과 동일한 성씨를 가졌고 외모 또한 비슷한 고려인도 있지만, 세대가 지나면서 타민족과 결혼하여 출생한 외모가 다른 고려인도 있다.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할 것이라 인식한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어를 상실한 지 오래고 한국인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해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지내고 있다.
이들이 이산가족이 되면서까지 한국으로 이주하게 된 요소로는 출신국의 요소이다. 그 배경에는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진행된 이슬람 민족주의의 부흥, 주류민족 중심의 언어정책, 소수민족에 대한 취업과 교육 기회의 제한 등을 들 수 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CIS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영향, 한국 정부와 NGO단체 등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모국방문 기회 증가, K-POP 등의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 한국의 높은 경제성장률에 따른 고용기회 증가 등을 통해 형성된 한국에 대한 기대 상승을 들 수 있다. 특히 고려인 사회에 공유되는 한국의 특별한 의미, 즉, 고려인들에게 한국이 연해주와 더불어 역사적 뿌리와 사회적 연고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 고려인의 한국행 배경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인이 한국행을 택하는 다양한 배경요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동기는 취업을 위한 경제적 요인이다.

<표 1> 재외동포 자격별 체류 현황
 (2019. 02. 28. 현재, 단위 : 명)
출처: 법무부(2019)

위의 표와 같이 2019 출입국 통계에 의하면 약 50만 고려인동포 중 현재 국내 거소 등록된 고려인동포는 9만여 명에 달한다. 이에 동반 자녀를 포함하면 약 10만 명 이상이 체류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국내의 고려인동포 500명 이상 집거지를 이루며 거주하는 도시는 안산을 비롯하여 아산, 천안, 인천, 광주, 경주 등 16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중 안산에 9천여 명, 인천에 약 4천 5백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법무부, 2019).
인천의 경우 최근 2,3년 사이에 어린 자녀를 동반하고 한국에 들어오는 고려인동포가 크게 증가하였다. 2018년 연수구청의 통계에 의하면 연수구에 거주하는 고려인동포는 약 4,058명으로 이 중 70%가 넘는 3,146명이 연수구 함박마을 일대에 거주한다. 이는 함박마을 전체 주민의 약 46%를 차지하는 숫자로 국내 최대 고려인동포 거주 밀집지역이 되었다. 이는 최근 2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며, 지금도 매년 500명 정도가 증가하는 추세라 한다. 이로 인해 연수구 함박마을을 ‘고려인동포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박마을이 ‘고려인동포마을’이라 할 정도로 고려인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요인은 보증금이 필요 없는 작은 ‘원룸’의 저렴한 집값과 인근의 공단의 접근성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함박마을은 외국인이 몰려들자 상가를 원룸으로 개조하여 무보증 월세로 임대하고 있다. 이주 초기 어려운 형편으로 생계를 꾸려야하는 고려인동포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특히 인천 함박마을에는 고려인동포들이 운영하는 크고 작은 식품점은 물론이고 노점상에서부터 300석의 예식홀을 갖춘 대형 레스토랑까지 있어 한국어를 모르는 고려인이라 할지라도 생활하는 데 커다란 문제점은 없어 보인다. 이처럼 함박마을에서 집거지를 이루며 사는 것은 한국어를 상실한 고려인동포에게 러시아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단순히 상호부조를 넘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고려인동포마을 형성과 성장은 함박마을의 낙후된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사회문제를 야기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예컨대 지역사회가 게토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과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외국인 주민과 지역 주민 간의 마찰과 갈등,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지역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 간에 갈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려인동포들이 한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이주하여 살 집과 자녀들의 학교 현황, 일할 수 있는 곳 등을 문의하고 입국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하지만 한국어를 상실한 고려인동포들은 건설 현장이나 인근의 공단에서는 환영받지 못하고, 고려인동포라 하여도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사회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김포나 이천, 강화 등 먼 거리의 일용직으로 일하느라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이들이 함박마을에 거주하는 이유는 자녀들의 교육 때문이다.
현재 함박마을 인근의 초등학교에는 러시아, CIS지역에서 태어나 생활하다 한국으로 노동 이주를 택한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온 약 2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학교에서는 계속 늘어나는 고려인 차세대의 건강한 적응을 위해 러시아어 이중언어 강사를 채용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새롭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큰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고려인 차세대들은 차별과 무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하지만 고려인동포 학부모들은 온종일 힘든 노동일과 미숙한 한국어 탓에 자녀들의 한국학교 생활 적응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공장에서 돌아온 저녁 9시 이후에 한글을 배우고 싶지만 야학을 운영하는 곳이 없어 그마저도 어려운 현실이다.
고려인 4세는 다문화가정 자녀들과 달리 지역아동센터 등을 이용할 자격조차 없어 돌봄 등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고려인 자녀 영유아는 보육료 지원을 받을 수 없어 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가정 보육을 직접 도맡아서 하는 가정도 있다. 보육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보육 기관과 소통의 문제에 따른 것도 존재한다. 초등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집에 보호자 없이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고려인 영유아 자녀와 초, 중등 학생, 그리고 부모들까지 학교와 가정을 연결해주는 방과후교실과 보육시설, 그리고 고려인 성인을 위한 성인 한글 야학이 절실한 실정이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잊고 있었던 타지에서 고난을 이겨내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견인한 고려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회자하고 있다. 지난 4월 20일 문재인 대통령께서 “고려인 1세대는 모두 독립유공자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물론 타지에서 고난을 이겨낸 고려인에 대한 경의의 표현도 포함된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러시아로 통하는 철도가 연결되고, 북한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면 고향을 북한에 둔 고려인들의 쓰임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고려인동포를 단순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귀환자’로 맞이할 때가 되었다. 대부분의 고려인동포는 단순히 일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이주한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조상의 나라, 내 조국에서 정착하려는 정주(定住)를 목적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지역주민으로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역 내 고려인동포와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문화‧자활지원 프로그램 운영과 복지 네트워크 구축 등 공동체 사업들을 추진하여 이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글 · 사진 / 박봉수(朴奉秀, Park Bong Su)
교육학박사, 디아스포라연구소 소장, 인천고려인문화원 공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