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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땟골 사람들"

        우즈벡에서,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들이 땟골에 모여 살아요


 
작성일 : 16-05-17 17:42
[인권웹진]사람과세상- 길에서 만난 세상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9,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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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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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살고 싶어요

글 박영희 사진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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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에 위치한 외국인주민센터 별관 건물로 들어설 때였다. 초등학생 10여 명이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김사샤(러시아), 김베로니카(우크라이나), 박아리아(사할린), 최나딸리아(우즈베키스탄), 문알렉세이(카자흐스탄)……. 모두 고려인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박알렉스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알렉스는 한국에 언제 왔어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3학년 때요.”

  “알렉스 반에도 고려인 학생이 많아요?”

  “네. 많아요. 한국 학생은 11명, 고려인 학생은 10명이에요. 그렇지만 더 생겨날지 몰라요.”

  “그건 왜죠?”

  “저처럼 끼어(편입)들 수도 있어요.”

  아직은 우리말이 서툴지만 알렉스의 표정은 밝고 힘차 보였다.

  오후 6시경 주민센터에서 나와 찾아간 곳은 고려인이 운집해 있는 '땟골삼거리'였다. 2009년 다문화특구로 지정된 원곡동 일대에서는 우리말보다 러시아어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  우리말을 배울 곳이 없었소


임이고르(57) 씨가 한국을 찾은 건 2003년 가을이었다. 관광비자로 입국한 그는 세라믹 제조 공장에 입사했다. 합법적 체류 자격이 없었지만 이고르 씨는 이듬해, 아내마저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회사가 쉬는 날 아내가 내 손을 잡아끌지 않겠소. 땟골에 한번 가보자고 말이오. 경기도 광주에는 고려인이 없어 무척 외로워했었소.”

  이고르 씨 부부가 거처를 땟골로 옮긴 건 그로부터 2년 뒤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살 때도 느낀 거지만 고려인들에게 학교는 매우 중요한 장소 중 하나다. 학교를 중심으로 고려인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땟골도 우즈베키스탄과 비슷하지 않겠소. 고려인 학생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한국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들이 하나둘 땟골로 모여들기 시작한 거요.”

  하나 일은 간단치 않았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몇몇 학생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고르 씨는 부아가 치밀었다.

  “글쎄 한국 선생이, 사춘기에 접어드는 학생들한테 한국어도 모르면서 학교엔 왜 왔느냐며, 욕하고 때렸다지 뭐요. 어찌나 화가 나던지 고려인 부모들과 학교로 몰려갔었소. 한국의 학생들도 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잖소. 그런 학생들에게 말도 제대로 못 한다며 상처를 주면 좋겠소? 학교는 배우러 가는 곳이지, 다 아는 걸 복습하러 가는 곳은 아니잖소.”

  교장과 장시간 면담을 마친 후 교문을 나설 때였다. 이고르 씨는 자신의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이고르 씨는 한글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가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고려인 학교)를 제외하면 모두 러시아 학교뿐이었다.


  “우즈베키스탄 학교에도 고려인 출신의 선생들이 있었소. 그런데 한날 선생이 고려인 학생들만 따로 불러 이리 말하지 않겠소. 너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고 말이오. 공산주의 체제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다 들키는 날엔 선생도 학생도 학교에서 쫓겨난단 말이오. 이제 알겠소, 고려인들이 왜 우리말을 잊게 됐는지? 잊고 싶어서 잊은 게 아니라 배울 곳이 없었소.”

  이고르 씨에게 그것은 커다란 상처이자 한으로 남았다. 일본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동포들은 그곳엔 우리말을 가르치는 학교도 많고, 우리말도 마음껏 할 수 있지만 고려인들은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고려인 1세대가 세상을 뜨면서 2, 3세대는 차츰 우리말을 잃어갔다.


  “내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소. 선생이 학교를 떠나는 날 너무 귀한 말을 해주지 않겠소. 다른 건 다 잊어도 좋으니 우리말로 인사하는 것만 꼭 기억해두라는. 200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말로 인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선생 덕이었소.”

  폐교 직전에 놓인 선일초등학교를 살려놓은 것도 다름 아닌 고려인들이었다. 처음엔 학교 측에서 고려인 학생들을 받지 않겠다며 반대가 심했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수시로 학교를 찾아가 읍소를 멈추지 않았다. 고려인들이 한국을 선택한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자녀들 교육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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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적당히 벌어 한국을 떠날 거였다면 굳이 자녀들까지 데려올 필요가 있었겠소. 만나보시면 알겠지만 돈에 눈멀어 한국을 찾아온 고려인은 많지 않을 거요. 우린 한국에 살러 왔단 말이오.”

  그러면서 이고르 씨는 한 가지 서운한 점도 내비쳤다. 3ㆍ1절과 광복절 특집극이 그것이었다. 고려인 항일운동에 대해 특집방송까지 하면서 정작 고려인들을 외국인 노동자 취급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했다. 고려인을 다룬 특집극에서 분명 '한민족'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국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한국이 먼저 우리를 불러주었고, 고려인 아이들이 학교에서 우리말로 수업을 받고 있으니 더 바랄 게 뭐 있겠소. 나야 고려인으로 살다 고려인으로 죽어도 상관없소. 내 할아버지의 땅에서 아이들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오. 또 그렇게만 된다면 조상들이 조선 사람이었듯이, 아이들이 그 뒤를 이어가지 않겠소. 아시다시피 고려인들은 스탈린 강제이주 정책(1937년)으로 너무 오랜 세월을 떠돌이처럼 살아왔단 말이오.”


  한국에 와 살면서 뼈저리게 배운 것도 있다. 가장, 즉 아버지의 역할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이혼은 우스꽝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다.

  “아내가 싫어지면 남편들이 어찌하는 줄 아시오? 도망치듯 슬그머니 집을 나가면 그걸로 끝이오. 동네에서 의원을 하신 내 아버지도 그런 분이었는데, 새장가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마음껏 갈 수 있소.”

  책에서 얼핏 본 적 있다. 고려인들은 '모계사회'라는. 이 점은 박단야(51) 씨를 만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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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갈 곳이 없어요


  “고려인들이 대체로 이른 나이에 결혼하는 편이에요. 여자는 18세, 남자는 20세를 전후해 하거든요. 나도 열여덟 살에 결혼해 아들 셋을 혼자 키웠는데, 지금은 모두 한국에서 지내고 있어요.”

  카자흐스탄에서 출생한 단야 씨는 1998년 국적을 러시아로 바꿨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카자흐스탄의 경제도 큰 문제였지만, 사회주의 체제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시장에서 장사하더라도 뜯기는 게 너무 많았다. 하루는 경찰이, 다음 날은 세무서에서, 그 다음 날은 깡패들이 다녀갔다.


  2006년 겨울 한국을 찾은 단야 씨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일했다. 가장 큰 장벽은 언어였다. 식당 일이야 몸으로 견디면 그만이지만 언어 문제는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손님들이 나이를 물을 때 좀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걸 왜 묻는지 이해를 못 했으니까요. 고려인들은 아시아 문화보다 유럽 문화에 가깝단 말이죠.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에서 상대방 나이를 묻는 건 극히 드문 일이기도 하고요.”


  급여도 신통치 않았다. 하루 10시간 노동에 월 급여 85만 원이면 러시아에서 벌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우수리스크에서 사진사로 일할 때 50만 원을 받았던 것이다. 식당일을 그만둔 단야 씨는 안산으로 자리를 옮겨 화장품 용기를 생산하는 공장에 입사했다.

  “한국인들도 외국에 코리아타운을 두고 있듯이, 고려인들에게 안산이 그런 곳이라고 보면 돼요. 나도 안산으로 옮겨온 뒤부터 한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으니까요. 왜 조선 속담에 그런 말도 있잖아요. 자식들 입으로 음식 들어가는 걸 지켜볼 때 엄마는 행복감을 느낀다는. 열심히 일해서 받은 월급을 자식들한테 송금할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200만 원을 받으면 생활비로 50만 원만 남겨두고 다 보냈거든요.”


  한국을 배우고 한국을 알아가는, 단야 씨는 지금의 시간들이 즐겁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야 씨는 한국에서 처음 시내버스를 탔을 때 좋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시내버스 요금을 몰라 5000 원짜리를 주었더니 기사 분이 화부터 내지 않겠습니까. 그때 만약 어떤 할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릅니다. 너무 창피하고  당황스러웠거든요.”


  얼마 전부터 단야 씨는 고려인들을 위한 인터넷 카페를 만들고 있다. 공항에서 맞닥뜨리는 출·입국 수속을 비롯해 인력시장, 일자리, 셋방 구하기 등 고려인들이 한국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모아 러시아어로 알려주는 카페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 대한 평이 왜 그렇게 안 좋죠? 고려인이 한국 말도 못한다며 무시하고, 짜증내고, 반말하고……. 공항은 그 나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첫 관문이자 심사를 받는 곳이잖아요. 고려인들에게 그 길부터 안내하고자 카페를 만드는 중인데 쉽지는 않네요.”


  단야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카자흐스탄 이야기가 나온 건 3,4분 지나서였다.

  “카자흐스탄을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던 날 묘소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아버지 어머니, 기다리시지 말라고요. 세 아들과 함께 한국에서 살 거라고 했어요.”


  부모님이 사망하자 단야 씨는 러시아(우수리스크)의 집도 정리해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단야 씨처럼 한국으로 떠나올 때 집을 정리한 고려인이 땟골에는 의외로 많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는 양로자 씨도, 사할린에서 왔다는 김알레리아 씨도 같은 입장이었다. 다만 그들은 머잖아 다가올 노후를 염려했다. 한국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고려인들은 외국인 노동자나 다름없었다. 건강보험은 물론이고 국민연금마저 가입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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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땟골삼거리 '너머'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온 고려인들이 '너머(고려인 지원 단체)' 지하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이분' '저분' '그분' 등 문법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승룡 씨가 진행하는 수업을 잠시 지켜본 뒤 1층 사무실로 올라가 김진영 부장과 마주 앉았다. 땟골삼거리(선부2동)에 자리 잡은 '너머'는 고려인들의 숨통이랄까. 두세 평 남짓한 비좁은 사무실은 오후 9시가 훌쩍 지났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신이 없죠? 하루 상담만 10건이 넘는데,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것부터 임금체불까지 일손이 턱없이 부족한 편이죠. 한국어를 모르니 어떡하겠어요. 누군가는 그들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한국에 체류하는 고려인은 3만여 명으로, 그중 7000여 명이 땟골에 거주하고 있다. '너머'는 2011년에 문을 열었다.


  “각 지역에 주민센터가 있긴 하지만, 땟골의 경우 러시아어를 모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요. 한국어보다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곳이 땟골이니까요. 땟골도 처음엔 조선족들이 거주했다고 들었어요. 보증금 없이도 싼 가격대의 방을 구할 수 있으니 이만한 곳도 없었던 거죠. 그 자리를 지금은 고려인들이 채우고 있는 셈이고요.”

  아닌 게 아니라 땟골은 전혀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어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고려인들과 상담을 해보면 안타까울 때가 참 많아요. 뿌리를 내릴 만하면 강제 추방을 당했잖아요. 고려인 1세대가 러시아에서 중앙아시아로 추방을 당했다면, 그다음 세대는 1990년대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갈 곳마저 잃어버렸다 할까요. 중앙아시아에서 소수민족 밀어내기가 노골화하자 몸을 피해 한국을 찾아온 거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이 나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려인들은 150년째 광야를 떠돌고 있다는.

  "현재는 임금체불 상담이 많은 편이지만, 그보다 더 큰 너머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봐요. 그동안 만난 고려인들만 봐도 한국에 정착하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으니까요. 단순한 돈벌이 이주에서 벗어나 뿌리를 내리고 싶은 거죠.”


  동반 입국 가정이 대부분인 땟골의 고려인들. 고려인들에게 월세를 받아 생활을 영위한다는 집주인 김정란 씨도, 마트를 하는 최호남 씨도, 인력소개소를 운영하는 임양배 씨도 '너머'에서 일하는 김진영 부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고려인(동포)을 외국인 노동자로 보는 데 대해 마음이 썩 편치만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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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님은 시인·르포작가로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만주의 아이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등이 있으며, 최근 중국 옌벤 조선족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집 <두만강 중학교> 여행 에세이 <하얼빈 할빈 하르빈>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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