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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땟골 사람들"

        우즈벡에서,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온 고려인들이 땟골에 모여 살아요


 
작성일 : 17-12-06 22:03
[연재-고려인 그들의 삶을 듣다] 조국-우리가 살고 있는 곳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7,500  

조국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저희 할아버지 천사엽은 1913년 연해주 한인마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연해주 한인들이 자치적으로 삶을 일구고 모국어만을 사용할 당시 저희 할아버지는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셨습니다. 제가 어린시절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얘기를 즐겨 하셨던걸로 기억합니다.

할머니 성함은 박 니나입니다. 할머니도 1914년 연해주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할머니는 젊은시절 아름다우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하셨습니다. 둘은 결혼하셨고 세 명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가정은 평화로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1937년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리라고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이 공포의 단어 '이주'. 화물칸...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공황...물과 먹을것이 없어 사람들은 죽어가고... 품에 있던 나의 아이들이 하나 둘 차례로 숨을 멈추는 극한의 공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세 아이를 모두 잃으셨습니다.

그러나 깊은 고통과 큰 아픔을 겪으며 수 주간 계속되었던 공포의 터널을 지나오셨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러시아어를 모르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어떻게 그 고통을 지나오셨는지 얼마나 큰 아픔이셨는지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이 제 생애 내내 너무 애석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카자흐스탄 허허벌판에 내려졌습니다. 기아, 추위, 절망으로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한 상황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살아남으셨고 함께 곁을 지키셨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살 집을 짓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섰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낯선 땅에서 자신들의 삶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그분들은 다시 가정을 세웠습니다. 다섯명의 아이: 아들 셋, 딸 둘을 낳았습니다. 전쟁 중에 할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노동 용맹» 상을 받으셨습니다.

1956년 할아버지 할머니는 따뜻한 기후와 많은 과일이 나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하고 다시 거주지, 일을 찾아 새로운 삶을 설계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고려인들은 이미 집단농장을 이루어 농사일에 전념할 때였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집단농장 '우즈베키스탄'으로 갔습니다. 해뜰녁부터 해질때까지 아이들을 먹이기위해 일했습니다. 그렇게 해가 가고 집단농장 '우즈베키스탄'은 이분들의 집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땅도 이분들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자신들의 삶으로, 조국 너희들이 살고있는 곳 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정신적으로 사랑해야하는 곳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20세 나이에 강에 빠져 죽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아픔을 넘지 못하시고 큰 병을 얻어 돌아가셨습니다.

 4명의 자녀는 교육을 받고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전 생애를 조국의 부름으로 일했습니다.

저의 아버지 표도르는 타쉬켄트 종합기술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기 전문기술자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존경받는 분이신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전기제품, 자동차등을 수리할 수 있었습니다. 고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매일 사람들이 뭔가를 수리해달라고 찾아왔던 걸로 기억됩니다.

둘째 아들 블라디미르 재능이 많은 예술가. 그는 극장에서 화가로 일하셨습니다. 포스터를 그리셨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집에는 벽에 많은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있었습니다.

큰 딸 안토니나는 타쉬켄트 교육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집단농장 제 9학교에서 30년간 일하셨고 '고급 교사' 칭호를 받으셨습니다.

막내 딸 소피야 훌륭한 회계사. 4분 모두 퇴직까지 콜호즈(집단농장)에서 일하셨습니다.

크게 안타까운 일은 우리의 모국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을 유지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본을 따라 우리는 아이 돌잔치와 환갑잔치를 한국 전통에 따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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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무너지고 3세대 들에게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우즈벡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적인 차별을 했고, 국어로 우즈벡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5년 내에  전체적으로 우즈벡어 통용을 계획했습니다.

그 해, 민족차별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집을 팔고 우즈벡을 떠났습니다. 거의 매일 친구들과 지인들과 이별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러시아로 떠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때였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경제적인 완전한 붕괴였습니다. 인플레이션으로 할머니와 많은 사람들이 저축해두었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떠나자고 강하게 말씀하셨지만, 아버지가 '우즈베키스탄은 우리 나라고 더 좋은 곳은 없다'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우리는 경제 위기로 어렵게 지냈으나 우즈베키스탄을 믿고 남았습니다.

할머니는 2014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할머니는 훌륭한 생을 보내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신을 자식과 손자들을 보살피는데 바치셨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은 온전히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매 가을마다 4가족을 위해 된장,간장,김장을 하셨고 여러가지 절임 음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할머니가 지침없이 밭에서 키우시는 노고로 야채와 온갖 나물로 풍족한 영양섭취를 했습니다.

2010년 남편과 저는 한국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는 경제 사정 때문에 1년만 일을 하자고 계획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시선이 끌린 건 할머니였습니다. 모든 할머니들이 저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손자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저의 가슴에서는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던 저희와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나누지 못했던 것 때문에 평생을 애석해할 것입니다.

 저는 저의 아들과 딸이 한국어를 반드시 익혀야한다고 결심했고, 2012년 아이들을 한국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한국에 온 목적과 한국어를 배우도록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어는 우리의 모국어이고 그래서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4년의 기간동안 한국어 뿐 아니라 새로운 나라에 잘 적응하고 있어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 낯선 나라가 지금은 조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미래에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가족을 이루고 자신들의 꿈을 이룰 길을 찾고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이 나라를 자신의 모국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국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그곳이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디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저버리지 않으셨고, 언제나 강하게 살아남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없는데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해 얘기하셨고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온 마음을 다해 충실하셨고 모든 생애를 보냈던 곳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저도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사랑하자고.

 

 

 - 천 따찌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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