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고려인 3만명 시대…"정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한국어 못해 취업 문호도 좁고 임금 떼이기 일쑤"
(안산=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한국 사람들 따뜻해요. 러시아에 비해 기후도 참 좋고요. 근데 일을 못하게 하니 힘드네요. 살기가 어려워서 왔는데…"
러시아 연해주에서 온 50대 고려인 여성 K씨는 올겨울이 유난히 춥기만 하다. 2005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뒤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부품조립 공장에서 지난달 돌연 출근을 하지 말라는 통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연말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이 들이닥치면 업주나 불법 취업을 한 직원 모두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K씨가 한국으로 오기 위해 정부로부터 받은 비자는 재외동포(F4) 비자다. 하지만 관련 법에 따라 방문취업 비자(H2)로 들어온 동포들과 달리 단순노무직에는 취업할 수 없다.
K씨가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매일같이 공장으로 향한 이유는 몸이 아픈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12시간 근무에 잔업까지 꼬박해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월 160만원에 불과했지만, K씨에게 이 돈은 절박했다.
딸의 치료비 말고도 몇 해 동안 30만원까지 올라버린 방 월세를 내고, 또 러시아에 있는 아들 내외의 생활비로 보탰던 돈이기도 했다.
K씨는 기자에게 이런 하소연을 늘어놓으면서 연말까지는 버텨보겠지만 그 후로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일자리를 다시 구한다고 해도 또다시 쫓겨날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다.
고려인이 밀집해 사는 경기 안산의 선부동, 이른바 '땟골'이라 불리는 이곳에서는 K씨 같은 동포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조부모의 고향, 자신의 부모가 그리워하던 모국을 찾은 고려인 후손들이 안고 살아가는 일상적 풍경이기도 하다.
◇'땟골'의 이방인들…"국내 체류 고려인 3만 명 시대"
국내에 체류하는 고려인 수가 3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올 8월 법무부 통계자료 등에 따르면 재외동포에게만 발급되는 방문취업(H2)과 재외동포 비자를 기준으로 국내에 입국한 고려인은 2만2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 외 각종 비자로 들어온 이들과 불법 체류자까지 합하면 한국에 거주하는 고려인 수는 3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게 재외동포 관련 단체들의 설명이다.
방문취업과 재외동포 비자로 입국한 고려인 중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1만4천여 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는 러시아(4천300여 명)와 카자흐스탄(1천500여 명) 출신들이 주를 이룬다.
국내 입국 고려인들은 재외동포 정책이 활성화된 20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산 5천 명을 비롯해 수원, 부산, 광주광역시까지 전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거주 지역이 다양해져 가는 추세다.
고려인 정착 초기에는 비교적 생활이 수월한 수도권에 모여 살았지만 높은 생활비와 주거비에 부담을 느끼면서 호남의 광주까지 이동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광주에는 하남과 평동, 소촌 공단이 가까운 광산구 월곡동을 중심으로 최대 2천 명 가까이가 살고 있는 것으로 관련 단체들은 추산하고 있다.
이들은 부모의 고향, 자신과 닮은 형제들이 사는 나라를 보고 싶어 왔다기보다는 같은 핏줄의 땅이 주는 막연한 기대감에 한국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뿌리가 같은 동포들과 함께 일하며 산다면 현지에서의 '팍팍한 인생'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
그러나 고려인들이 한국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중국동포와 달리 어설픈 한국어 때문에 취업을 하기 어려운 데다 일자리를 구하더라도 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사업장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탓에 고려인 사이에서는 중국동포에 떼밀린 '2류 동포'라는 자조가 나오기도 한다.
- 고려인 밀집지역인 안산 '땟골'
-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고려인 밀집지역인 경기 안산 '땟골' 거리에 방문취업비자를 거주 안정성이 높은 재외동포비자로 쉽게 바꿔줄 수 있다는 내용의 광고가 걸려 있다. 2013.12.27 <<국제뉴스부 기사 참고>> eddie@yna.co.kr
고려인들의 애환은 사업장에 겪는 임금 체불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고려인 동포 지원단체인 '너머'가 지난해 11월부터 땟골 거주 고려인들을 상대로 고충 상담을 접수한 결과 일일 평균 6건 중 3건 이상이 임금 체불 문제였다.
27일 너머에 따르면 회사 사정이 어려워 임금을 늦게 주는 경우 말고도 한국말을 잘 못하는 약점 등을 이용해 고의로 아예 임금을 주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줘야 할 돈을 떼먹어도 한국말로 변변한 항의조차 못하는 점을 노린 것이다.
너머의 김영숙 대외협력국장은 "고려인 대부분이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탓에 자신이 임금을 떼인 직장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런 약점을 이용해 소액인데도 주지 않고 버티는 때도 있다"고 전했다.
◇고려인 이주 150주년…지원방안 '절실'
내년이면 고려인 이주가 시작된 지 꼭 150년이 된다. 국내외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추진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내 체류 고려인들을 향한 정부의 관심은 멀게만 느껴진다.
너머 같은 민간단체나 종교단체가 고려인들의 손발이 돼 주고 있는 실정이다.
9월 광주광역시의회가 처음으로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을 지원하는 조례를 제정하기는 했지만 고려인을 바라보는 관심은 지역 단위에 머물러 있을 뿐 정부 차원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고 있다.
작년 재외동포 선거가 처음 실시되면서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에 대한 관심은 크게 늘었지만 정작 국내에 가까이 있는 동포들은 외면받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고려인 2천 명가량이 머무는 땟골에서는 너머를 중심으로 한국어 야학과 임금 체불 해결 등이 이뤄지고 있지만 손길이 모두에게 미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지원 인력은 물론 무언가 해 볼 만한 공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안산에서 인력 파견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동포 자격으로 일하러 온 고려인들을 지원하는 정부 정책이 없고,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데 제도 자체가 없다"면서 "외국인을 대하는 것과 다른 게 뭐냐"고 꼬집었다.
재외동포 비자 소지자의 단순노무 취업제한 규정을 놓고도 말이 무성하다. 동포 대부분이 '막일'이라도 하고자 한국을 찾고 있지만 법이 이런 현실에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방문취업 비자를 가진 동포들은 단순노무 업종에 취업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반면 거주기간은 최장 4년 10개월에 불과해 3년마다 거주 갱신이 가능한 재외동포 비자로 바꾸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속적인 체류를 위해 재외동포 비자를 얻게 되면 단순노무는 할 수 없는 탓에 먹고살려면 불법 취업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동포들의 국내 체류 안정을 높이면서 취업 기회도 보장하는 방향으로 비자 정책이 전환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너머의 김승력 대표는 "국내에 있는 동포 중에서도 고려인들은 사정이 가장 어려운 분들"이라며 "거주 안정성을 높이거나 취업 기회를 확대할 경우 국내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역차별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향후 입국 동포 상황을 지켜보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법무부는 재외동포 비자 소지자의 단순노무 취업제한과 관련된 질의에 "국민 일자리 잠식 우려가 있어 재외동포 자격 소지자에 대해 단순노무 행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면서 보완책으로 2007년부터 방문취업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와 관련해 헌법소원이 제기돼 있는 만큼 향후 중국동포 등의 국내 입국 희망 인원 추이를 고려해 제도 개선 방향을 결정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