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또 한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지 꼭 100년째 되는 해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거주지를 옮긴 의병들이 모이던 곳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가 만들어졌는데요.
그 동안 남북 모두가 이 지역의 독립운동을 살피는 데 소홀히 한 게 사실입니다.
해방 후 많은 시간이 흐른만큼 이 지역의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도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데요.
지금이라도 남북이 함께 힘을 모아 선열들의 업적을 발굴하고 계승하는 노력이 필요해보입니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흔적 이정민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러시아 스파스크 주 두봅스코예 마을.
영하 19도의 날씨에 밖으로 나와 취재진을 반갑게 맞는 사람, 고려인 3세 김 알라 할머니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김 할머니가 자랑스럽게 꺼내놓는 물건들.
낡은 총 일부분과 안에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손때 묻은 주머니, 그리고 오래된 작은 사진 한 장입니다.
[김알라/홍범도 장군 외손녀 : "1921년에 붉은 광장에서 찍은 겁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셔서 저에게 이 영광을 물려주셨어요."]
사진의 주인공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대승리로 이끈 의병장입니다.
바로 그 홍 장군이 자신의 외조부라 자랑스레 말하는 김 할머니.
유품들은 홍 장군이 1943년 숨을 거둘 때도 머리맡에 두었던 것들이라고 합니다.
[김 알라/홍범도 장군 외손녀 : "할아버지가 1945년에 한국의 해방을 못보고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파요. 그 소식을 못 듣고 저 세상으로 가셔서 안타깝습니다."]
1937년 홍 장군은 강제이주 당해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졌고, 농장 관리와 경비원 일을 하며 생을 마쳤습니다.
[김 알라/홍범도 장군 외손녀 : "(어머니가) 언젠가 한국 사람들이 찾아 올 거라고 저에게 얘기했어요. 그 때 할아버지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죠."]
올해는 전 세계에서 대한독립의 외침이 이어졌던 3.1 운동, 그리고 그 결과 나라밖에서 임시 정부가 세워진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가운데 100년 전 이곳 연해주에서 벌어졌던 독립 운동을 살펴보는 건 연해주가 당시 해외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의 어느 주택.
말끔히 지은 새 집에 붙은 낡은 현판에 집 주소가 쓰여 있습니다.
서울거리 2A, 이 곳 주민들은 이 일대가 과거 한인 집성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세르게이 예고로프/서울거리 2A 집 주인 : "예로부터 이 곳을 ‘까레이까’라고 불렀어요. 매우 넓었죠. ‘서울스까야(서울거리)’는 저기 끝까지 있었어요."]
길을 따라 내려온 공터는 3.1운동 당시 만세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입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됐고 그 때 신한촌 입구에 동포들이 나무로 만든 독립문을 만들었습니다."]
신한촌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국외로 근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이 모여든 곳이기도 했는데요.
항구 가까이여서 세계 정세를 발 빠르게 접할 수 있고, 의병활동에 쓸 무기와 물자를 구하는 것도 수월했다고 합니다.
연해주 제 2의 도시 우수리스크.
올해 개관을 앞둔 이 조그만 기념관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까지 살던 곳입니다.
[조미향/‘최재형 기념사업회’ 연해주 지부장 : "1920년 4월 4일~5일 참변이 일어났는데 4월 5일 아침에 일본 현병에 의해서 잡혀가기 전까지 살았던 집입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러시아식 난로, 페치카가 눈에 띄는데요.
동포를 향한 따뜻한 애정을 가졌던 최재형 선생의 애칭이 바로 페치카였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거부가 됐지만, 재산 대부분을 항일 투쟁에 쏟아부을 만큼 조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최재형.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물밑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박환/수원대 사학과 교수 : "1910-20년대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 특히 시베리아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려질 정도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 최재형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재형의 집에서 불과 3분 거리인 이 초등학교.
최 선생을 포함한 러시아의 한인들이 모여 민족 자치와 항일 독립운동을 논의한 전로한족중앙총회 2차 모임이 있었던 곳입니다.
학생들의 방학기간을 이용해 이곳 학교건물 2층에서 치러졌던 전로한족중앙총회, 이 회의로 100년 전 연해주 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의 토대가 마련됐습니다.
3.1 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되는데요.
바로 이 대한국민의회가 3개의 임시정부 중 가장 먼저 탄생한 임시정부입니다.
의장 문창범을 비롯해 이동휘, 최재형 등이 중심이 됐고 반 년 뒤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될 때까지 독립군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국외 항일 무장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했습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었던 문창범의 집터, 한인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모여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재개발 구역 관리인 : "재개발 차원에서 건물을 모두 없앴어요. 여기 살았던 집들은 다른 집을 배정받았고요."]
1937년 스탈린의 정책으로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며 독립운동의 역사는 기억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한인 사회는 소련에 의해 일본 첩자들의 온상으로 지목받기까지 했습니다.
[김 발레리야/고려인문화센터 ‘아리랑 가무단’ 단장 : "고려인들만 아니고 다른 소수민족들 다 러시아 사람들까지 좀 이렇게 스탈린을 많이 무서워하는 지금 어떤 어르신들도 옛날 할아버지들 옛날 얘기를 물어보면 그런 말씀을 아주 조심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그때는 아직도 그 두려움, 불안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1937년 일곱 살 나이에 강제이주로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열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조 하리똔 할이버지.
[조 하리똔 : "어디로 실어가는 지 그거 모르지. 그래서 눈물이 팍 나고..."]
열차가 도착한 곳은 우즈베키스탄.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당장 오갈 곳도 없이 갖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조 하리똔 : "우즈베키스탄에서 우리(는) 학교에 (갈 수 없었어)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무시하고, 다른 아이들이 얕보고..."]
하지만 할아버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한인의 정체성을 깊이 간직했습니다.
[조 하리똔 : "저희 아버지는 저의 첫 번째 스승이에요. 저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조국에 대한 사랑을) 마음속으로 뿌리 깊게 심어줬어요. 한국을 사랑하셨어요."]
1945년 해방의 기쁨을 여전히 기억할 정도입니다.
[조 하리똔 : "삼천리 반도에 자유가 왔네! 나 1945년도에 해방했지. 아 즐겁게 우리는 놀았어요."]
다만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고 하네요.
[조 하리똔 : "평화통일을 해야 해요. 지금 발전하고 있는 조짐이 보여요. 비무장지대도 개방되고요. 이제 그만 싸워야 해요. 한민족끼리 그러면 안 돼요."]
러시아 우수리스크 시 인구 20만 중 10% 가량은 당시 조선인의 후손인 고려인입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고려인 문화센터.
매일 오후 익숙한 우리 가락이 흐릅니다.
주인공은 젊은 고려인 4-5세들.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들도 우리 무용을 배울 때만큼은 진지합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낯선 음악과 춤사위.
북한 춤인데요.
곧 이어 남한의 부채춤도 이어집니다.
[김사경/김 알라 : "고려인으로서 북한춤만 추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나라가 둘로 나뉘어져 있지만 예술은 우리 민족의 예술이니까 둘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학생의 한국 이름은 김 사경.
요즘 고려인 학생 사이에는 러시아식 이름 이외에 스스로 한국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이라는데요.
[김 발레리야/고려인문화센터 ‘아리랑 가무단’ 단장 : "지금 아이들은 자랑스럽게 나가서 '나는 고려인이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들마다 한국 이름, 우리 민족 이름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연해주에서 살아간 지 100여 년, 연해주의 고된 독립운동은 그동안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혀졌었습니다.
[송지나/극동연방대학교 한국어과 교수 : "중국도 사회주의국가, 러시아도 사회주의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한국이 중국, 러시아와 연구를 못했잖아요. 북한에서는 주체 공부만 시키고 그리고 김일성 중심으로 교육이 됐기 때문에…"]
하지만 고려인들은 여전히 조국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대물림하는데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고려인들에게 조국은 남도 북도 아닌 일제 식민시절 이전의 하나였던 조국, 최근 불어온 남북 관계의 훈풍에 통일에 대한 기대감도 강하게 내비치는데요.
[조 하리똔 : "우리 3세대는 오직 평화 통일을 원해요. 그래서 철도도 연결하고 그런 거잖아요. (우스리스크에서 기차에) 앉아서 북조선, 평양, 서울, 부산까지 가보자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로 떠났던 고려인들.
먼 이국땅에서 그의 후손들은 다시 하나가 될 조국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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