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은 러시아 CIS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노동영웅 김병화선생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였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각종 행사들이 많이 개최되었다. 특히 지난 10월21일에는 모스크바 민족자치회관에서 김병화재단 주최로 김병화선생을 기리는 기념식과 각종 부대행사들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는 러시아측에서 바체슬라브 바라노프 러시아연방 민족관계국장, 예브게니 바자노프 러시아외교아카데미총장, 블라디미르 타라소프 모스크바민족센터소장, 유리 바닌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한국학 원로교수, 우즈베키스탄을 대표하여 아크말 카말로프 주러시아 우즈베키탄대사, 고려인 동포대표로 조바실리 러시아 고려인연합회장, 그리고 한국측에서는 박노벽 주러한국대사, 김흥수 총영사, 김원일 전 모스크바한인회장등이 참석하였다.
이날 행사에는 기념식과 더불어 김병화기념 사진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회화전, 그리고 김병화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회의 등이 함께 개최되었다.
박노벽대사는 이날 기념사에서 “김병화선생의 개척정신은 현재 한국과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상황세서 우리가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김병화선생이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고려인동포들과의 화합과 협동을 위해서 노력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한국과 러시아 그리고 구소련 지역간의 친선과 협력을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한국역사 학자인 유리 바닌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원로교수는 “고려인들이 구소련과 러시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 새 세대와 러시아인들은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고려인 선조들의 업적을 기리고, 이것을 알리는 행사들과 출판물 발간들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다른 콜호즈(집단농장)에서는 한명도 나오기 어려웠던 노동영웅이 김병화 콜호즈에서는 26명이나 나온 기적 같은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김병화선생은 1956년에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프라브다’지에 소개되면서 소련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관지에 따르면 김병화선생이 책임자로 일했던 ‘북극성’ 콜호즈는 사회주의 이중 노동영웅을 포함해 총 26명의 노동영웅(그중에 25명이 고려인동포)과 415명의 훈장 수여자를 보유한 소련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콜호즈로 성장해서 타지역의 모범이 되었다. 이에 소련당국은 김병화선생에게 이중 노동영웅칭호 외에도, 4개의 레닌훈장과 1개의 시월혁명훈장, 2개의 노력적기훈장, 1개의 노력표식훈장 등을 수여했다. 또한 선생은 우즈베키스탄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1946년부터는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5기부터 8기까지 연속으로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재외동포저널은 2015년 김병화선생 탄생 110주년 행사들을 준비했던 ‘김병화재단’ 김 로베르트이사장을 만나 김병화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김병화재단의 활동에 대해서 들어보는 기회를 가졌다. 김 로베르트 이사장은 김병화선생의 손자로 김병화재단을 설립하고 김병화선생의 기념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김병화선생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들을 준비하게 된 계기와 소감은?
2015년 조부 김병화선생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을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중점사업 중 하나는 김병화선생과 당시 콜호즈의 모습들을 담은 사진전이었다. 사진들은 주로 우즈베키스탄 당국의 협조로 많이 확보되었다. 우즈베키스탄당국에 감사드린다. 행사가 개최될 때마다. 러시아와 우즈베스탄의 책임 있는 당국자들이 찾아와 축하해 주었고, 한국대사관과 문화원 등에서도 여러가지로 협조를 많이 해주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떤 계기로 김병화선생이 노동영웅 칭호를 수여 받게 되었나?
콜호즈에서 조부가 중심이 되어 다른 고려인동포들과 함께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당 4~5톤에 이르는 쌀을 생산해 내었고, 일부 작업반들은 심지어 8톤까지도 생산하면서 농업적 성과와 김병화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소련 당국이 1948년에 조부에게 처음으로 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이후 1951년에는 콜호즈 건설과 목화 및 벼 수확고의 성과에 따른 결과로 다시 레닌훈장과 ‘낫과 망치’ 금메달을 받았다. 조부는 강제이주라는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갔던 고려인 동포사회의 희망이셨다.
고려인동포 콜호즈에 얽힌 일화가 있다면?
구소련 당시 고려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즈베키스탄 콜호즈(집단농장)은 20개에 달했는데 한결같이 우즈베키스탄인들에게 ‘백만장자’ 콜호즈로 불리우며 부러움을 사고는 했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에는 도시지역에도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이 거의 없었지만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콜호즈들은 자체 발전소를 만들어 전기를 생산해내어 콜호즈 전체에 가로등까지 설치해서 우즈베키스탄인들이 단체 견학을 올 정도로 발전된 모습이었다.
김병화선생이 이중 노동영웅칭호 수여 후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최초로 3번째로 노동영웅칭호를 수여 받을 수 있었다는데?
당시 흐루시쵸프 소련 서기장이 김병화선생에게 3번째로 노동영웅을 수여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이 3번에 거쳐서 노동영웅을 수여받기보다는 우즈베키스탄사람이 상을 수여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며 사양한 적이 있다. 이것은 선생의 겸손과 고려인동포와 우즈베키스탄인 사이의 화합과 단합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언제 베트남의 호치민주석이 김병화선생의 농장을 방문하였는가?
1959년에 당시 베트남 호치민주석이 소련 방문시에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선생의 콜호즈를 방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흐루시쵸프, 브레즈네프 서기장 등 구소련의 정치지도자와 사회주의권의 다른 지도자들도 자주 농장을 방문하여 선생과 고려인동포 농장원들의 놀라운 성과를 살펴보는 일정을 가지곤 했다.
고려인동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고려인들은 그동안 구소련지역 곳곳에서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해내었다. 120여개에 이르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민족들 중에 교육열이 가장 높고 박사학위 소지자는 인구를 대비하면 유대인 다음으로 많다. 뿐만 아니라 고려인의 범죄율은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우수한 인적 자원이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고려인들의 역사적 전통을 지켜져 나가야 하고 이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현재에도 이런 전통과 정신을 살려나가야 한다. 김병화재단은 이런 역할들을 앞으로도 중점적으로 해 나갈 계획이다.
조부 김병화선생을 비롯한 고려인 지도자들이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듯이 구소련이 무너진 후에 새롭게 이주해온 러시아와 모스크바에서도 고려인동포들의 새로운 기적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필자도 김병화선생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때 러시아정부를 대표하여 참석했던 바체슬라브 바라노프 민족관계국장이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던 것이 새삼 떠오른다.
“고려인들이 살아온 150년은 정치적으로는 러시아제국, 소련, 러시아 등으로 국가가 바뀌는 격변기였고, 대외적으로 러일전쟁, 1~2차 세계대전 등을 거치는 등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고려인으로 인해서 단 한번도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다. 고려인들은 러시아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시민으로 러시에 필요한 우수한 인적자원이다.”
지금은 많은 고려인동포들이 선생이 활동하던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닦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김병화선생의 정신은 이들 고려인 동포들의 삶에 큰 귀감이 될 수 있다. 김병화재단이 러시아와 고려인사회에서 더욱 활발히 활동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