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최재형 선생. |
[고양신문] 올 해는 ‘53년 정전체제’라 불리는 분단체제가 해체되고, 통일로 가는 ‘평화와 번영체제’의 원년이 될 가능성이 높다. 2월 말로 예상되는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의 가닥이 잡히고,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양 방문 등이 이어질 경우 남북한은 본격적인 교류·협력의 시대를 맞게 된다. 평화와 번영의 희망이 꿈틀대는 새해를 맞으며 99년 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일본군에 피살되었던 최재형 선생을 생각해본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북 경원군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연해주로 건너가 큰 부호가 된 후 이범윤의 의병운동과 홍범도의 무장투쟁 그리고 안중근의 이등박문 처단 등을 후원했고, 학교 설립과 신문 발간 등을 통한 계몽운동을 하다가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셨던 분이다.
선생이 활약했던 연해주는 향후 한반도 평화체제가 조성될 경우 동북아시아 교류협력의 중심지가 될 매우 핫(hot)한 지역이다. 남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물류가 만나는 곳으로서 20세기 초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야심적인 ‘대동아공영권’ 정책을 펼치기 위해 동북아의 전략적 중심지로 설정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 곳은 국경에 인접해 있고 땅이 비옥해 19세기 중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월경해 정착했기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대부 역할을 했던 분이 선생이다.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
최재형 선생은 철저한 민족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국제주의자였다. 선생은 국권 회복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쳤으며,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칠 방도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고 실행하였다. 노선이 다르더라도 자신의 집에 머물던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의 경비를 다 부담했으며,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척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때는 무기와 자금 등을 후원하였다. 연해주 조선 사람 중 가장 큰 부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선생이 1917년 무렵에는 집 한 채도 없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선생의 부친 최홍백은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지주의 머슴으로 살다가 1869년 기근을 맞아 가족들을 솔거해 연해주 포시에트 지신허로 월경했다. 일가는 토지를 개간해 농사를 지었는데 일손이 모자라는 와중에도 부친은 선생을 러시아학교에 보냈다. 농사일은 많고 식량은 모자라는 환경에서 혼자만 학교에 다니며 논다는 이유로 형수의 구박을 심하게 받던 선생은 급기야 12살에 가출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무역선 선원이 되었다. 선생은 선원으로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특히 양부모로 인연 맺은 선장 부부의 지도를 받으며 폭넓은 교양과 국제지식 등을 습득했다.
이후 연해주로 돌아와 러일전쟁 등을 기회로 큰 돈을 벌게 되는데, 연추지역의 도헌(읍장)을 하는 등 연해주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선원생활을 통해 얻은 국제적 안목과 뛰어난 러시아어 구사능력으로 러시아 관헌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동포들이 연해주 현지에 원만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선생은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민족주의를 정의할 때 연대의식과 민족수호의지, 그리고 발전 지향을 3대 속성이라고 한다면 민족주의와 국제주의는 서로 상충할 수 없다. 근래 민족주의를 배타적 속성이 강한 것으로 오해해 터부시하는 것은 단견인 것이다.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이 스탈린과의 대화에서 “나는 민족주의자와 국제주의자로 함께 남고 싶소”라고 선언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북한이 협력해 미·중·러·일 등 주변 강대국들의 방해를 뚫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우리 민족에게 최재형 선생은 훌륭한 사표이다.
실사구시와 후덕
최재형 선생은 실질을 중시하고 후덕한 삶을 사셨다. 선생은 무장투쟁을 중요시하고 연해주 의병세력의 국내 진공작전에 전력투구하기도 했지만 그 부작용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동포들에 대한 교육과 실업 장려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현실주의 노선을 평생 일관되게 유지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선생은 허명을 쫓지 않았다. 1896년 아관파천 후 친러 내각이 들어섰을 때 대한제국 조정에서는 러시아 통역관들을 중용했다. 당시 러시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선생에게도 당연히 조정의 부름이 갔는데 선생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노비 출신으로서 신분 상승의 욕구가 누구보다 컸을 그였지만 연추 도헌 업무에 전념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족되었을 때도 선생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나 상해로 가지 않았다. 상해에서 공리공론하느니 시베리아 현장에서 활동하는 게 더 항일투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편 선생은 항일투쟁을 위해 연해주에 건너왔지만 생활기반이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이들이 현지인들과 갈등할 때는 중재하였다. 항일을 위해서라면 신분 의식이 강했던 복벽주의자들과도 힘을 모았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기탄없이 협력했다. 주변 사람들이 선생을 ‘페치카’(러시아 난로)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것도 바로 이런 후덕함 때문이었다. 교류·협력 시대를 맞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하는 새해 벽두를 맞아 실사구시와 후덕을 실천했던 선생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