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건강보험 차별 폐지를 위한 공동행동 소속 단체들이 26일 오후 청와대 앞에서 이주민 차별이 강화된 건강보험 제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러시아 국적인 고려인 2세 김라리사(63)씨는 지난해 8월부터 경기도 안산에서 8살 외손녀를 돌보며 딸 김아무개(41)씨와 함께 살고 있다. 김씨 모녀는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에 따라 체류기간이 최장 3년이나 지속적인 국내 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F-4) 비자를 가지고 있고, 제한적이나마 취업도 가능하다. 홀로된 이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딸 김씨는 서툰 한국어 탓에 파견업체를 통해 공장 일자리를 구했다. 한달 최저임금(174만원) 안팎을 벌어 월세 40만원을 낸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세식구가 올해 7월부터 매달 내는 건강보험료(건보료)는 22만6100원, 어떻게 된 일일까?
보건복지부는 올해 초 국민건강보험법을 개정해 6개월 이상 국내에 체류하는 모든 외국 국적자에 대해 건강보험 ‘지역가입’(직장가입자를 제외한 도시 및 농어촌 지역주민 등 대상)을 의무화했다. 종전엔 3개월 이상 국내 체류 외국인에 대해 건보 지역가입 자격이 부여됐고, 가입 여부는 개인 선택이었다. 건보 직장가입이 돼 있지 않은 이주민이 지역가입을 할 땐, 소득·재산에 따른 보험료와 전년도 전체 가입자가 낸 평균 보험료(올해 11만3050원) 중 높은 금액을 내도록 정해졌다. 영주(F-5)·결혼이주(F-6) 체류자격을 지닌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 대상자들이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무조건 한달 11만3050원 이상의 건보료를 내야 한다는 의미다. 딸 김씨는 같은 공장에서 2년째 일하고 있지만, 회사가 건보료 절반을 부담하는 직장가입이 되지 못했다. 서류상 회사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험료 부과 방식 뿐 아니라 지역가입자 세대원 인정 범위도 한국 국적자와 다르다. 세대(주민등록표상 함께 거주하는 가족) 단위가 아닌 ‘개인’ 단위로 보험료를 부과하고, 가입자 배우자와 만 19살 미만 자녀만 건보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변경했다. 내국인은 같은 세대원이면 지역가입자 부모와 성인 자녀, 형제·자매 등도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결국 김씨 모녀 두 사람에게 각각 월 11만3050원씩, 모두 22만6100원의 건보료가 부과됐다. 복지부는 50만원 이상 건보료를 체납한 만 19살 이상의 이주민 정보를 법무부에 주기적으로 넘기고, 체납이 3회 이상 반복될 경우 체류 연장을 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황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 건보 직장가입이 돼 있지 않은 대다수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도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월 11만3050원의 건보료를 내야 한다. <한겨레> 자료 사진
26일 구소련 및 중국 국적 동포·이주노동자·난민 지원단체들로 구성된 ‘이주민 건강보험 차별 폐지를 위한 공동행동’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외국인 건보 지역가입 의무화 이후 가난한 이주민들이 적게는 서너배 많게는 수십배 오른 건보료 고지서를 받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특히 지역가입자 세대원 인정 범위가 대폭 축소되면서 함께 살고 있는 나이 든 부모나, 몸이 불편해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녀도 건보료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현행법상 체류자격을 얻어 월 60시간 이상 일하고 있는 이주민들은 건강보험 직장가입이 돼 있어야 한다. 1인 이상을 고용한 사업장이라면, 한달 노동 60시간 미만(주 15시간 미만) 노동자를 제외하곤 국적과 상관없이 모두 건보 적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의 외국국적 동포나 난민 인정자, 인도적 체류자 등 이주민은 건보 직장가입이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정부가 숫자를 정해놓고 입국을 허용하는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조차 건보 직장가입을 못해 지역가입자로 자동 가입돼 매달 11만3050원을 부담해야 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장시간 노동, 의사소통 장벽 등 문제로 몸이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주민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복지부는 국내 체류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건강보험 적용 확대 및 합리적 관리를 위한 제도 개선이라고 밝혔으나, 정작 이주민들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졸속으로 정책을 마련했다. 지난해말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모든 이주민들이 한국 국민과 동일한 수준의 보험료로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도록 개선을 검토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이주민센터 친구의 조영관 사무국장(변호사)은 “예산 집행 사업도 아니고 사회보험료 징수를 확대하면서 체류 자격별 가계 소득이 얼마인지, 거주 형태가 어떤지, 취업시 월급은 제대로 받고 있는지 등 실태조사 한번 없이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즉각 제도 시행을 중단하고 보완을 고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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