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인터뷰> 김 율리아(고려인 4세) : "(한국에서는) 적응이 좀 빨리 되고 친구도 생겼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제가 고려인이니까요."
<인터뷰> 오 니콜라이(고려인 3세) : "비자 바꿔야 돼요. 그냥 나이 때문에 저 할 수 없어요. 한국말도 잘 모르고 나이도, 나이 때문에 좀..."
낯선 러시아어 간판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이 곳은 백여 년 전 고국을 떠났던 고려인의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 모여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온 고려인 가운데 성인이 되면 쫓기듯 한국을 떠나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조들의 나라에 정착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리포트>
안산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17살 임 카롤리나 양.
<녹취>" 먼저 1번에 나와 있는 초기화, 초기화 작업부터 같이 한 번 해보겠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의 카롤리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4세입니다.
4년 전 엄마를 따라 한국에 온 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녹취> "이렇게? 일, 이, 삼, 사, 오, 육?"
아직 우리말이 서툴지만 밝은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 카롤리나(고려인 4세) : "과학 시간에 아니면 국어 시간에 어려운 말 나오면 좀 이해 안되고, 시험을 어떻게 보는지 잘 이해 안되고... (친구들이랑 지내는 거 재미있어요?) 네, 재미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카롤리나.
<녹취> "나 왔어."
엄마를 만난 카롤리나 러시아어 통역 자원봉사를 하며 받은 위촉장부터 자랑합니다.
엄마는 이렇게 한국에 적응해가는 딸이 대견합니다.
그런데 마음 한켠은 무겁습니다.
<인터뷰> 김 예카테리나(고려인 3세) : "제 딸이 앞으로 한국에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비자 문제 때문에그럴 수 없을까봐 걱정이에요."
엄마가 걱정하는 건 우즈베키스탄 국적인 카롤리나의 비자 문제입니다.
1999년에 제정된 재외동포법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와 살기를 원하는 재외동포는 경제활동이 보장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등 내국민과 거의 동일한 권리를 갖습니다.
그런데,해당 법령은 재외동포를 부모 또는 조부모의 한쪽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민자의 3세까지만 재외동포의 자격이 있는 겁니다.
이민 3세인 카롤리나의 엄마는 재외동포 자격이 있지만, 4세인 카롤리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카롤리나의 한국 체류는 성인이 되기 전 19살까지만 유효합니다.
<인터뷰> 임 카롤리나(고려인 4세) : "어떻게 해야지,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어떻게 해야하는지...아니면 법 고치면 안될까?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그 이후에는 유학생으로서 한국 대학에 입학하거나 가족과 헤어져 홀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겁니다.
<인터뷰> 임 카롤리나(고려인 4세) : "(다시 우즈벡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요?) 기분이 나빠요. 우즈베키스탄으로 가기 싫어요. 제가 고려인이잖아요. 저기서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에요. 좀 비교(차별)했어요."
카롤리나는 자신보다 더 어린 고려인 아이들의 한국어 공부를 도와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임 카롤리나(고려인 4세) : "(한국에 온 지) 이제 4년이 됐고 이런 애들한테 한국어 공부 가르치면 좀 마음이 있어요.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카롤리나의 꿈은 통역사가 돼 고려인들의 한국생활을 돕는 겁니다.
<인터뷰> 임 카롤리나(고려인 4세) : "대학도 가고 그리고 통역사가 돼서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도와주고 이렇게 한국에서 살고 싶어요."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성년을 맞은 고려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4년 전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온 니콜라이는 올해 23살입니다.
대학에 가지 않은 니콜라이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인터뷰> 오 니콜라이(고려인 3세) : "일 때문에 좀 힘들어요. 비자 때문에 지금 일 없어요. 좀 힘들어요."
성인이 됐지만 재외동포 자격을 얻지 못했습니다.
니콜라이의 비자는 90일 동안만 체류할 수 있는 단기방문 비자.
취업불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을 하는 건 불법으로 일을 하다 적발되면 추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90일마다 출국 후 재입국을 해야 비자가 갱신되기 때문에 매번 인근 국가를 다녀오고 있습니다.
돈은 벌지 못하고 있는데 석달마다 당일치기로라도 해외를 갔다와야하는 상황입니다.
<인터뷰> 오 니콜라이(고려인 3세) : "(한 번 나갔다 올 때마다 돈 얼마나 들어요?) 50만 원. 3개월에 50만 원. (3년 동안 왔다갔다 했으니까?) 12번.(600만 원 정도?) 네 600만 원."
니콜라이는 할머니가 대한민국 국적이어서, 고려인 3세로 재외동포 자격이 있긴 합니다.
<인터뷰> 오 니콜라이(고려인 3세) : "우리 할머니, 할머니 고향이기 때문에 여기 좋아요. 그냥 여기 우즈베키스탄보다 여기가 더 좋아요."
고려인 3세인데도 출국과 입국을 되풀이해야하는 건 재외동포 자격에 대한 또다른 단서 때문입니다.
재외동포 자격을 얻기 위해선 4년제 대학의 졸업장 또는 기능사 이상의 국내 공인 자격증이 있거나 일정 소득 이상의 직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격 요건은 중앙아시아나 중국, 동남아 국가 출신 동포들에게만 적용되고,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 출신 동포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니콜라이처럼 경제력이 낮은 나라에서 온 동포들이 내국인의 일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재외동포 자격을 제한하는 겁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탓에 니콜라이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자격증을 따야만 재외동포로서 한국에 살 수 있습니다.
<인터뷰> 곽재석(한국이주동포 정책개발연구원장) : "완전 차별이죠. 동포들을 A,B,C,D 등급으로 서열을 분류한 거죠. A등급은 미국, 캐나다, 영국 이런 선진국에 있는 동포들은 직업 구분 없이 뭐든지 하여튼 엄마,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한국 국적을 가졌었다면 나는 어떤 상태였든지 무조건 한국에 F4(재외동포) 비자를 받고 들어오게 돼 있고..."
구한말부터 시작된 고려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일제 강점기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연해주로 떠나면서 본격화됐습니다.
1937년 옛 소련의 스탈린은 황무지를 개간하라며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8만 명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버립니다.
낯선 땅에서 목화밭을 일구며 힘든 삶이 이어졌지만 고려인들은 이 곳에서 고려인 마을을 만들어 정체성을 지켜왔습니다.
<인터뷰> 이영숙(고려인 지원단체 '너머' 사무국장) : "생활문화나 식습관 여러가지에서, 그 다음에 돌이나 환갑 이런 것들 할 때, 그 다음에 우리 한식을 지내고 이런 모습을 볼 때는 굉장히 많이 그 부분에 대해서 노력을 많이 했다고 볼 수 있죠."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고려인들은 현재 4만 명 정도.
최근에는 중앙아시아의 경기 침체로 가족 전체가 이주하는 경우가 늘면서 고려인 마을에는 아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지금은 부모와 함께 한국에서 살 수 있지만 성년이 되면 이 아이들 대부분은 다시 이방인이 돼야 합니다.
<인터뷰> 이영숙(고려인 지원단체 '너머' 사무국장) : "성년이 돼서 다시 돌아갔을 때 가족과의 생이별 문제도 있고, 그 다음에 거주국으로 돌아갔을 때 과연 이 동포 4세 자녀들이 학령기를 보낸 대한민국에 있다가 성년에 다시 돌아갔을 때 적응하고 살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나중에 아마도 굉장히 큰 동포 사회에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동포 4세에게도 재외동포 자격을 줘야 한다는 목소리에 법무부는 관련 법 개정안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나 중국 등 일부 국가 출신의 동포에게만 대학 졸업장 등의 자격 요건을 두는 제도는 불법 체류 등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입니다.
<녹취> "(이것도 시험에 나와?) 응, 부여는 만주."
중간고사를 앞두고 함께 한국사 공부를 하고 있는 세르게이와 율리아.
친구 사이지만 둘의 처지는 다릅니다.
세르게이는 할아버지가 한국인이었던 고려인 3세. 대학을 졸업하면 재외동포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리아는 증조할아버지가 한국인이었던 고려인4세. 재외동포 자격을 얻을 수 없어 성인이 되면 한국을 떠나야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둘은 각자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 세르게이(고려인 3세) : "만약에 제가 성인이 되면 그 국적을 바꿀 수 있는데, 율리아 같은 상황은 4세라서 국적을 못 바꾸고 비자를 못 바꾸는 상황..."
<인터뷰> 김 율리아(고려인 4세) : "저 스무 살 되면 나가야, 한국을 떠나야 되니까...한국을 떠나면 어디로 갈지 몰라서 걱정이 돼요."
고려인 3세인 친구를 부러워 해야하는 율리아,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을 앞두고 공개편지를 통해 답답한 마음을 담아냈습니다.
<녹취> "저는 할아버지 나라 한국에 바라는 것이 많이 없습니다.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한국어로 한국말을 못해 어려워하는 고려인들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제 친구들이 더 이상 비자 때문에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고국 땅으로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는 고려인 후손들, 이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