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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22 12:25
[여성신문]김경애가 만난 황무지의 들꽃, 고려인 여성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4,921  
   http://www.womennews.co.kr/news/view.asp?num=86845#.VihWOVK6HDf [5718]
김경애가 만난 황무지의 들꽃, 고려인 여성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가 7월 21일부터 8월 4일까지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해 고려인 여성 20명을 만났다. 국제한인간호재단과 국제한국보건의료재단 지원으로 실시 중인 고려인 1000명 건강검진사업과 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으로 실시하고 있는 비쉬켁 외각지대의 지역개발과 보건의료사업에 참여를 통해서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내몰렸던 고려인. 그들은 버려진 황무지를 맨손으로 일궈 삶의 터전으로 삼고 다시 일어서 유라시아의 들꽃으로 불린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만난 20~80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강제 이주 이후의 고려인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고려인 여성들의 삶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김경애가 만난 황무지의 들꽃, 고려인 여성’은 격주로 연재된다.
내 남편은 내가 정한다: 연애결혼의 시대
입력 2015-10-06 07:28:49 | 수정 2015-10-08 오후 12:03:00


경애가 만난 황무지의 들꽃, 고려인 여성

중매결혼 하는 키르기스인과는 달리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 결정해

▲ 비쉬켁 도심에 서있는 마나스 동상.   ©김경애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는데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땅에 인구는 우리의 10의 1인 570만 명으로, 우리나라와 시간 차이는 불과 3시간으로 직선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은 나라다. 키르기스의 마나스공항에서 수도 비슈케크 중심가까지 키가 20미터(m)가 넘는 아름다운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넓은 길은 거의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도심에는 낡았지만 웅장한 공공건물과 넓은 광장, 그리고 국가 영웅들의 동상이 배치돼 있는 공원들, 특히 일리아드 오디세이보다 긴 서사시로 영웅담이 내려오는 건국 영웅 ‘마나스가 말을 타고 있는 위용’은 키르기스의 자존심을 드러낸다. 한때 세계 2대 강대국 소련 연방의 일원이었던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키르기스는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4반세기가 가까워 오지만 독자적인 경제 건설에 고심하고 있다.

키르기스는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나라이지만 ‘나쁜(bad)’ 무슬림으로 이슬람의 교리가 실제 생활을 크게 규제하지 않았고, 결혼은 전통적으로 당사자와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정하며 신부 값과 결혼지참금이 오고 가는 중매결혼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과 결혼하고 아내가 죽으면 처제와 결혼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러시아혁명 이후 자유연애가 시작됐다. 우리나라도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일본을 통해 도입된 사회주의 사상으로 1920년대 이후 신여성과 신남성들의 연애가 사회를 풍미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붉은 연애』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자들의 이념이 됐고, ‘구여성’인 본부인과 이혼을 반대하는 부모로 인해 신여성들은 첩이 아니라 제2 부인이라는 칭호로 자신들이 연애결혼임을 드러냈다.

키르기스에서도 자유연애의 의지는 러시아혁명 이후 젊은이들을 강타하고 형성된 새로운 문화로 보인다. 고려인들도 러시아 문화에 동화되어 주말이면 사교춤을 추러 공원으로 나가곤 했다. 소비에트 시절, 카자흐스탄 타슈켄트의 고리키 공원에는 주말이면 수백 명의 젉은 고려인 남녀가 모여서 서로 사귀고 춤추며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 고려인 여성들은 일주일에 한 번 호텔의 홀을 빌려 고려인 여성들은 하루 종일 춤을 춘다. 남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여성들끼리 블루스를 추는 모습.   ©김경애

필자가 인터뷰한 고려인 여성 중에 부모의 중매로 결혼한 경우는 80대부터 20대에 이르기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단 두 사례만이 친척 소개로 만났고 대부분이 고려인촌이나 중·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다. A는 자신의 부모와 남편의 부모는 사할린에 교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다시 중앙아시아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남편은 우즈베키스탄에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는데, 사할린에서 다시 만나 “좋아해서” 결혼했다고 했다. 강루드밀라도 남편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마을에서부터 아는 사이로 러시아에서 대학을 다닐 때 남편도 같은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결혼했다. 원나리샤도 남편은 같은 대학에서 에너지를 전공한 엔지니어다.

60대의 에스터는 일찍이 러시아인 남성과 결혼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다시 러시아로 가서 재혼해서 하바롭스크에서 새아버지와 함께 살았는데, 자신이 스물세 살이 됐을 때 친구들은 다 결혼하고 자신만 미혼으로 남았으나 고려인 남성을 만나기 어려워 러시아 남성과 비밀 연애를 했다. 마침내 결혼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물론이고 새아버지도 고려인과 결혼해야 한다며 적극 반대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결혼했다고 한다. B도 아버지가 자신의 첫 남편과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결혼했다고 했다. 오히려 “러시아인 이반”이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착하고 성실했던 아버지는 자신이 러시아인과 결혼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대부분은 고려인끼리 결혼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실행하는 반면, 일부는 인종의 벽을 허물고 자유롭게 러시아인이나 키르기스인과 연애하고 결혼했다. 고려인 여성이 키르기스 남성과 결혼한 경우는 한 사례로, 30대 젊은 의사의 남편은 의과대학을 같이 다닌 학우로 이 여성이 국비로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자 자비로 모스크바까지 가서 같이 공부하면서 연애하고 결혼했다. 20대 여성인 C의 경우는 주변 친·인척의 만류에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러시아계 남성과 결혼했다.

부모나 친·인척들은 자신들이 원치 않는 배우자감과 자녀가 연애하고 결혼하려고 하는 경우에도 적극 반대하기보다는 애석해하는 정도다. 배우자 선택은 당사자가 하고, 부모나 친·인척의 의견은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못했다. 한반도에서는 일제강점기에는 연애는 일부 신여성들에 한정됐고, 1950~1960년대까지도 중매결혼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금도 중매결혼이 성행하는 것에 비해 키르기스에 사는 고려인 여성들은 연애결혼이 결혼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자신의 삶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고려인 여성들의 확고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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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8호 [세계] (2015-09-21)
김경애 전 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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