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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가 만난 황무지의 들꽃, 고려인 여성 ②
인내 미덕으로 여긴 한국 전통 여성관 버리고 주체적이고 단단한 고려인 여성으로 뿌리 내려
▲ 장윤경 호남대 간호대학 교수와 권인숙 이대부속고등학교 교사가 고나타샤 부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경애
고려인 여성 고나타샤(64)씨는 고혈압, 담석, B형간염 등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 10년 전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다리도 아프다. 약값이 비싸서 친지의 고혈압약을 가끔 얻어먹는데 때로는 이 때문에 밤새 설사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남편(71)은 대장암을 앓고 있지만 자신의 혈압을 재주고, 시장에 양파와 감자를 팔러 갈 때는 낡은 화물차를 운전해준다고 고마워했다.
국제한인간호재단(GKNF)이 국제의료보건재단(KOFIH)의 지원으로 키르기스스탄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려인 1000명 대상 검진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방문간호를 위해 집으로 찾아온 호남대학교 간호대학의 장윤경 교수를 비롯한 방문자들에게 그녀는 결혼한 지 50년 된 남편을 “평생 나에게 큰소리 한 번 친 적이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키르기스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 여성 1세대부터 3세대까지 19명을 만나고 난 후 마지막으로 만난 그녀로부터 “좋은” 남편을 처음으로 소개받았다. 그동안 만난 40대 이상 고려인 여성 15명 중 2명을 제외한 13명이 첫 남편과 이혼이나 사별을 했다는 얘기를 담담하게 말했다. 나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 과정에서 겪었을 아픔과 슬픔 때문에 가슴이 아리던 참에, 여러 가지 병으로 고통스럽기는 해도 서로 아끼는 노부부를 만난 것은 나에게도 행복으로 다가왔다.
고려인들은 조선왕조 말 가난 때문에 한반도를 떠나 러시아 땅 연해주를 중심으로 삶을 개척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안중근 등의 독립투사들이 망명해 조국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스탈린은 고려인들을 일본의 스파이라고 의심하고 명망가들을 투옥시키는 공포 분위기 속에 강제이주정책을 시행했고, 고려인들은 이주 통보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집과 가축을 두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식량과 옷가지를 싼 보따리와 약간의 이주비를 받아 들고 자신들의 ‘역사적 고향’을 한 맺힌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다.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실려 중도에 4만여 명이 희생된 끝에 한 달 만에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맨손으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인터뷰한 대상자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 아래에서 어렵게 살았고 결혼 후에도 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고려인 건강검진 대상자를 선정하는 위원으로 활약하는 전직 의사인 주안나(76)씨는 화가였던 남편을 교통사고로 사별했고, 남또마래이(74)씨는 기자였던 남편이 20년 전 과로로 갑자기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다. 남편의 외도가 홀로되는 또 다른 주요한 사유가 되기도 했다. 고려인들이 개척한 임차농업의 일종인 ‘고본질’로 많은 돈을 벌어, 이 돈을 밑천으로 카지노와 식당을 경영한 강루드밀라(70)씨는 남편이 어린 키르기스 여자와 “바람이 나서” 33년간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을 끝내고 마지못해 이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혼의 경우 대부분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했다. 1918' 년 러시아혁명 이후 여성 해방을 역설했던 레닌의 이념이 제도화되어 배우자 한쪽의 요구로 이혼이 쉽게 성립될 수 있도록 됐다. 스탈린 시대는 반동이 일어났으나 남녀평등의 이념은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규범이 됐고 고려인 여성들도 가정폭력을 휘두르거나 무기력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특히 고려인들이 이주 이후 겪은 가장 큰 사회적인 격변은 1991년 소련의 붕괴였다. 러시아어만 구사할 줄 알았던 고려인들은 대부분 실직했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민족주의 부활 앞에서 특히 남성들은 희망을 잃고 좌절했고 무기력에 빠졌다.
이베로니카(51)씨는 “내가 알고 있던 남자들 중 마약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물론 아버지, 남동생도 그랬다”고 말하면서 마약중독이 된 남편과 이혼했다고 했다. 중앙아시아에는 5월에 야생 양귀비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데, 양귀비에서 추출되는 마약 성분을 손쉽게 얻을 수 있어 당시 많은 남성들이 쉽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유방암으로 시작해 온몸에 암이 번져 삶의 마지막 여정을 품위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이어가고 있는 장엘리아나(64)씨도 딸이 5살 때 소련 붕괴 이후 무기력한 남편과 이혼했다. 고려인 남성들의 좌절은 알코올중독과 가정폭력으로 이어졌고 이 또한 이혼의 주요한 사유가 됐다.
남편이 가정폭력, 외도 등 무슨 일을 저질러도 참고 살았던 우리나라 전통 여성의 모습과는 달리 이곳 고려인 여성들은 일부종사의 전통 윤리에 따라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인식을 일찍이 던져버렸던 것이다. 의처증이 있었던 남편을 “내쫓았던” 이아브라차(71)씨는 이혼한 남편이 다시 재결합하자고 요구하지만 또다시 남편과 같이 살 생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고려인 여성들은 낯선 땅 키르기스에서 주체적이고 단단하게 뿌리 내리며 살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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