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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8 21:41
[연합뉴스]<또 하나의 이웃>모국 속의 이방인, 안산 고려인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852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2/02/0200000000AKR201602022… [7761]

<또하나의 이웃> ①모국 속의 이방인, 안산 고려인


<※ 편집자 주 = 길거리에서, 버스에서, 식당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이주민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한국 땅을 찾아온 이들은 피부색도, 언어도 다르지만 점차 생활 반경을 넓히며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핏줄을 이어받아 생김새는 똑같으면서도 외국에서 나고 자랐거나 어릴 때 해외로 입양돼 우리말과 한국 문화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모국 속의 이방인으로 사는 동포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주민이라는 단어 뒤에서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까요? 연합뉴스는 국내 체류 외국인 190만 명 시대를 맞아 고려인, 조선족, 국제결혼 여성, 외국인 근로자, 해외 입양인을 만나봤습니다. 설 연휴 기간 5회에 걸쳐 소개할 인터뷰 시리즈를 통해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이웃으로 자리 잡게 될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안산=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시베리아 같은 한파가 불어닥친 지난달 하순.

경기도 안산시의 '땟골'을 찾아가는 길에도 칼바람이 몰아쳤다.

안산은 고려인 7천여 명이 사는 국내 최대 거주지다. 이 중에서도 땟골로 불리는 선부동은 3천여 명이 터를 잡은 '고려인 동네'로 통한다.

이들 고려인은 실제로 시베리아를 떠돌다가 '할아버지의 땅'인 한국을 찾아온 이주민이다.

이들에겐 한국의 겨울이 시베리아보다 따뜻할까.


땟골 고려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시민단체 '너머' 사무실로 곧장 찾아갔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겉보기엔 외모부터 말투까지 여느 초등학생과 다르지 않지만 이름이 조금씩 낯설다.

올가, 엘레나, 알렉(이상 가명) 등 러시아어 이름이다.


"고려인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자녀들이죠. 동반비자(F1) 입국이 지난해 급증했어요. 어릴 때 한국에 와 정규 학교에 다니는데, 방과 후나 방학 중에 저희 사무실로 한국어를 배우러 오죠. 자원봉사자들이 틈틈이 시간을 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땟골 고려인의 '대모'로 통하는 김영숙(50) 너머 사무국장의 말이다.


그는 지난 2011년부터 너머에서 고려인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사실상 그가 맡은 역할은 1인 10역에 가깝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주민센터, 학교, 건강보험공단까지 곳곳을 뛰어다니며 고려인에게 통역자이자 상담자, 야학 선생님이자 동네 친구 역할을 한다.


정부도, 지자체도 아닌 민간단체가 발 벗고 나선 까닭은 뭘까.

"국내 고려인 동포는 외국인 이주민 중에서도 사각지대에 놓였거든요. 다문화가정 같은 혜택을 받지도 못하고, 조선족처럼 언어 소통이 자유롭지도 못하죠. 하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고려인만큼 한민족의 뿌리를 지켜온 이주민이 없을 겁니다. 이들은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잊고 살았던 공동체 정서를 강하게 지키고 있어요."


김 국장 말대로 고려인이 걸어온 발자취에는 한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겼다.

1864년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고려인'이 된 한인들은 시베리아의 척박한 땅을 가까스로 일궜으나 스탈린의 강제 이주에 떠밀려 또다시 중앙아시아 황무지를 떠돌아야 했다.

고려인 3세, 4세가 돼 150여 년 만에 선조의 땅으로 돌아온 이들은 타향에서도 된장·고추장·김치를 담가 먹고, 결혼도 가급적 고려인끼리 하는 풍습을 이어왔다.


그러나 오랜 유랑 생활 끝에 모국어를 잃어버린 대가는 너무 컸다.

"어차피 중앙아시아에서도 소수민족이고, 러시아로 돌아가도 이방인일 바에야 선조의 땅에서 터를 잡자는 게 국내 귀환 고려인의 생각이었죠. 그러나 언어라는 장벽이 너무나 높아요. 말이 안 통하니 일용직 일자리밖에 구하지 못하거든요. 한민족의 후손이지만 정작 고국에선 외국인 근로자로 분류된다는 게 아이러니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조선족과 달리 고려인은 내국인의 일상생활에선 좀처럼 마주치기 힘든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하지만 소외돼 있는 고려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온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게 김 국장의 설명이다.

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국내 고려인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이주 단계를 넘어 정착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

최근 1∼2년 사이에 동반비자로 자녀를 데리고 오는 고려인이 급증했다는 게 그 신호다.


"중앙아시아로 돌아가는 대신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며 살겠다는 거죠. 안산만 해도 놀라운 변화를 겪고 있어요.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거든요. 예전에는 고령화 위기에 놓인 도시였는데 말이죠. 통폐합 소문이 돌던 학교에 학급도 늘었고요. 동네에 생기가 도는 거죠."


이처럼 고려인이 지역 사회의 '수레바퀴 역할'을 할 거라는 게 김 국장의 진단이다.

"모두 그렇다고 보긴 어렵지만 고려인은 대체로 성실하고, 씨족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인 고유의 공동체 정서를 이해하는 이웃이 되는 거죠. 내국인과 고려인이 함께 마을운영위원회도 열기 시작했어요. 반상회 같은 거죠. 고려인은 비교적 성실하게 월세를 내는 세입자라 동네 집주인들이 선호하기도 합니다(웃음)."

그러나 고려인들이 조금씩 봄바람을 꿈꾸기 시작한 것과 달리 제도적·정책적 지원은 아직도 꽁꽁 얼어붙었다.

너머에 따르면 임금 체불 등으로 부당 대우를 경험한 고려인이 80%에 달하고 건강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고려인도 65%를 웃돈다.

다문화가정 자녀와 달리 저소득층인데도 보육 지원을 받기 어려운 탓에 하루 벌이 일터에 나가면서 보육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고려인도 많다.


일용직 일자리가 사라지는 겨울철이면 차디찬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 쓸쓸하게 숨지는 고려인도 나온다.

김 국장은 "무엇보다 고려인이 한국에 정착한 이웃이 되도록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방적인 혜택을 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공동체 문화 덕택에 고려인끼리 SNS로 정보를 공유하고, 보육 품앗이를 하면서 스스로 생존하려는 노력이 커지고 있죠. 다만 이들의 발목을 잡는 차별과 불합리를 해소했으면 해요. 지방자치단체마다 한국어 교육을 확대하고, 구직 정보를 러시아어로도 제공하는 것만으로 고려인에겐 단비가 될 겁니다."

김 국장은 최근에도 건강보험공단에 이의신청을 냈다.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한 고려인이 동반 입국한 가족을 피부양자로 등록하기 위해 제출해야 하는 서류 일부가 중앙아시아 본국에선 개인 자격으로 구할 수 없는 양식이라는 것.


특히 동반 입국 가족이 대부분 영유아부터 청소년인 고려인 자녀라는 점에서 제도 개선이 절실하다고 김 국장은 강조했다.

너머 사무실을 찾아간 날에도 김 국장은 고려인 어린이를 모아 한글 교실을 열었다.

최근엔 인근 안산강서고교 학생들도 야학 선생님으로 변신해 고려인 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김 국장은 "이들 고교생은 한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이웃을 향해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면서 "어떻게 보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게 바로 이 학생들"이라며 웃어 보였다.

대를 이어 새겨둔 고향 땅을 찾아온 고려인 동포들. 어떤 외국인 이주민이 '코리안 드림'을 꿈꾼다면, 이들 고려인은 '코리안'이 되기를 꿈꾼다.

안산 고려인 까페 '우갈록' 앞에 선 김영숙 너머 사무국장
안산 고려인 까페 '우갈록' 앞에 선 김영숙 너머 사무국장

newglass@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6/02/06 08:00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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