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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2-30 14:25
[월간중앙 1월호] 조국에서 더부살이 인생? 3만~4만 카레이스키들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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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관리자
조회 : 1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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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5&aid=00026… [8122] |
2017년은 연해주에 살던 카레이스키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엔 하나둘씩 고국에 들어와 체류하는 고려인이 최근에 급격히 늘어 3만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타향살이의 설움은 할아버지대나 고려인4세가 등장한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안산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고단한 하루를 월간중앙이 동행취재했다.
지난 10월 초 금요일인 어느 날,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앞.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주택가는 고요했다. 오전 5시, 큰 가방을 하나씩 멘 남성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나타났다. 낡은 점퍼에 해진 바지를 입은 행색이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사람들은 서로 악수를 하더니 약속이나 한 듯 골목 한쪽에 모여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잠시 후 낡은 중형 승용차들이 전조등을 켠채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자동차에 올라탔다. 속칭 ‘나라시’라고 불리는 자동차들이다. 일용직 노동자들이 실어 나르는 카풀용 차들이다. 자동차 몇 대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렸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경계인의 삶을 사는 고려인들은 언어장벽으로 3D업종에 종사한다. 대부분 남성은 건설현장으로, 여성은 제품 포장 공장을 간다. 안산에서 멀지 않은 화성시는 중소기업이 밀집돼 있고, 건설현장이 특별히 많아 고려인을 포함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요가 높다. 김현동 기자 30여 분쯤을 달렸을까? 점점 동이 트기 시작한다. 자동차가 멈춰선 곳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의 인력시장. 파견노동시장이 대규모로 형성돼 있는 곳이다. 인력사무소 간판이 100m가 넘게 늘어서 있다. 사무소 앞에는 이들과 행색이 비슷한 사람이 러시아의 전통 빵과 홍차를 팔고 있다. 인력사무소 문이 하나둘 열리더니 한 사내가 나와 종이 한 장을 찢어 머리 위로 흔들며 소리쳤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사람들이 달려가 종이 쪽지를 받아 들었다. 그 외침은 기다리던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허 펠릭스! 조 따냐!” 낯선 이름이 호명됐다. 인력사무소 앞 의자에 쪼그려 앉아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으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섰다. 허 펠릭스(63) 씨다. 허씨는 손에 묻은 음식을 바지에 쓱 닦더니 종이를 받아 쥐었다. 그날 작업을 배정받은 업체 확인서다. “쓰빠시바(고맙습니다)!”
환갑이 넘은 허 펠릭스 씨는 한국에 온 지 올해로 4년째다. 딸과 부인이 뒤따라 한국으로 들어와 현재 세 식구가 안산시에서 거주한다. 나머지 가족 두 명은 우즈베키스탄에 남아있다. 인력사무소에서 건설현장으로 향하는 길, 허씨가 탄 차에 함께 탔다. 앞 유리창이 거의 깨진 소형 중고차는 심한 소음을 냈다. 차 안은 흙 냄새가 가득했다. 허씨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7시30분. 새벽같이 집을 나선 허씨가 본격적으로 하루 작업을 시작한다. 집을 나선 지 벌써 2시간반가량이 지난 시간이다. 이날 허씨가 간 곳은 인력사무소에서 30분가량 떨어진 화성시 송산의 아파트 건설현장. 1만 가구가 넘는 대규모 건설현장에서 허씨는 안전 난간 설치작업을 한다. 안전모를 착용한 허씨는 능숙하게 기둥을 조립하고 망을 설치했다.
1. 안 산시 상록구 사동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주변은 고려인 밀집지역 중 하나다. 동이 트기 전 오전 5시 일터로 향하는 '나라시(카풀택시)'를 기다리는 고려인들로 북적인다. 2. 인 력사무소 앞에서 러시아 전통 빵과 홍차를 파는 고려인 청년. 일터를 배정받기 전 대기하면서 허기를 달래는 고려인 동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공사현장을 지휘하던 박정수(가명) 과장은 “허씨가 고려인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요즘 한국인은 이런 일은 거의 안 해서 당연히 외국인 근로자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젊은 시절엔 경찰과 산림공무원으로 일했다는 허씨는 “월급이 20만원 정도에 불과했던 터라 지금 상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고 웃음을 지었다. 허씨를 포함해 이날 기자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고려인’ 이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의 후손이다. 러시아말로는 ‘카레이스키’(고려인이란 의미)라고 불린다.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간 한인들의 후손은 ‘조선족’이 됐고, 연해주 등으로 간 한인들의 후손은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해 ‘고려인’으로 불리게 됐다.
이들 고려인의 후손 가운데 최근 한국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었다. 그 대부분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 출신이다. 국내 거주 고려인은 벌써 3만 명을 헤아린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실에 따르면 러시아와 옛소련 지역 11개 국에서 재외동포 비자로 입국한 고려인은 2007년 21명에서 2010년 2873명으로 4년 만에 137배가량 늘었다. 그 후로 고국 행렬은 더욱 늘어났고 2013년에는 한 해에만 1만4936명이 대거 입국했다. 현재 국내 체류 고려인은 집계되지 않은 인원을 포함하면 4만 명에 가까울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추산한다.
고려인들의 이주 역사는 비극의 연속이다. 1864년부터 연해주 이주 한인들은 현지에서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고려인들은 또다시 ‘이방인’ 처지가 됐다. 이들 독립국가가 소련의 색채를 지우고자 민족주의 정책을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다. 2010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국제사회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에 나서면서 생활이 어려워지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의 고려인 동포들의 고국행이 줄을 잇게 됐다고 한다.
3. 고 려인 여성들은 포장과 조립공장에서 일을 많이 한다. 미끄럼 방지 패드를 포장하고 있는 최 빅토리아 씨. 4. 함 께 갈 동료들을 태운 현 알렉산드르 씨.'나라시'는 함께 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는 일종의 카풀 택시다. 일부 고려인들은 중고차를 장만해 동료들에게 소정의 금액을 받아 부수입을 얻기도 한다. 러시아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이들 국가의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8개월 전에 한국에 온 현 알렉산드르(35) 씨는 한때 모스크바에서 식당을 포함해 5개 사업체를 거느리던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한국에 온 현씨는 입국하자마자 중형차 한대를 구입했다. 먼저 입국한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현씨는 매일 자신의 승용차에 동료들을 태우고 함께 노동현장을 오간다. 1인당 왕복 5000원 정도의 교통비를 받아 부수입을 얻는다. 최 빅토리아(24) 씨는 1년 전 입국해 4개월 전 한 화학공장에 취업했다. 이곳에 서 미끄럼 방지 패드를 포장하는 일을 한다. 최씨는 “일이 어렵지 않아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아파트 현장 관리자는 “예전에는 건설현장에 조선족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고려인 동포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전했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용 러시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학 박사는 “남성은 공사현장의 일용직 근로나 화학·염료공장 등 위험성이 큰 일, 여성은 부품 조립공장 혹은 포장공장 등에서 단순 작업을 많이 한다”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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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의 풍경, 시간이 멈춘 마을
현재 경기도 안산시와 전남 광주광역시에는 고려인들의 대규모 커뮤니티가 있다. 안산의 고려인 마을에는 6000여 명의 고려인이 밀집해 거주한다. 안산시 주변 시화공단과 반월공단 등 저임금 단순노동을 필요로 하는 중소형 공장과 신도시 개발지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고려인 마을은 처음에는 다문화마을로 불리는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인근에 자리 잡았다가 선부동 ‘땟골’을 거쳐 요즘은 안산시 상록구 한양대 캠퍼스 주변의 원룸촌으로 확산되고 있다. 방세가 조금이라도 저렴한 곳을 찾아 자리를 옮긴 결과다.
1. 고려인이 운영하는 미용실도 인기가 많다. 고려인 마을에는 미용실, 음식점, 커피숍 등 다양한 고려인들을 위한 상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고려인 마을은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한국의 1960~70년대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덩그러니 돌아앉은 허름한 세탁소나 작은 호프집 간판이 한글 아닌 러시아 글씨로 쓰여 있다는 점 정도다.
이날 기자가 직접 찾아가본 고려인 마을은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한국의 1960~70년대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덩그러니 돌아앉은 허름한 세탁소나 작은 호프집 간판이 한글 아닌 러시아 글씨로 쓰여 있다는 점 정도다. 고려인 마을에는 중앙아시아 지역 음식을 파는 식당과 카페도 즐비하다. 카페 ‘우갈록’에서는 러시아 빵 ‘불로치카’와, 국수·만두·음료·차 등 중앙아시아 전통 먹거리를 판매한다. 10여 평 규모의 아담한 카페 한쪽 벽면에는 러시아어로 씌어진 책들도 꽂혀 있다. 설탕을 많이 넣은 커피는 한 잔에 1000원 정도에 팔린다. 동행한 이원용 박사가 “러시아어로 ‘우갈록’이란 ‘마음속의 편안한 공간’이란 뜻”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들 골목에서는 100여 년 전 한민족의 풍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기도 하고, 중앙아시아의 문화행사가 펼쳐지기도 한다. 안산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승력 대표는 “고려인들은 추석과 한식을 쇠고, 전통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환갑 잔치에는 다같이 한복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또한 보드카를 즐겨 마신다”고 했다. 우리 문화와 러시아, 중앙아시아식 문화가 혼재돼 있다는 것이다. 고려인들만의 특별한 ‘패션’도 눈길을 끈다. 이 박사는 “고려인 여성들은 눈썹 모양이나 손톱 손질에 많이 신경을 쓰고, 한국과 다른 독특한 중앙아시아식 헤어스타일을 추구한다”고 설명했다.
2. 안산 선일초등학교 다문화학급 학생 대부분이 고려인이다. 요즘 학교에서는 한국어가 서툰 고려인 부모를 위해 가정통신문 러시아어 번역과 방과 후 한국어 교육 등을 담당한다. 고려인들이 쓰는 방언도 희소성이 높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는다. 김 알렉스 씨가 운영하는 ‘타슈켄트’라는 이름의 식당에서는 미역국을 ‘메기장물이’, 콩나물국은 ‘질구미장물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고려인은 동포사회 내에서 혼인해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보수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고려인들이 쓰는 방언도 희소성이 높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는다. 김 알렉스 씨가 운영하는 ‘타슈켄트’라는 이름의 식당에서는 미역국을 ‘메기장물이’, 콩나물국은 ‘질구미장물이’라고 부른다. 오전 11시 반. 다문화학교로 지정된 선일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는 고려인들이 갑자기 늘어나자 러시아어 봉사 인력을 충원하고 학급 하나를 더 개설했다. 선일초등학교에 따르면 12월 1일 기준 고려인 자녀들이 전체 다문화학생 중 51.7%로 절반을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36.8%였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고려인 학부모를 위해 가정통신문은 러시아어로 번역해 보내고, 학부모 상담 때도 러시아어 통역을 지원한다. 고려인 4세대에 해당하는 고려인 마을의 자녀들은 다문화 가족지원법의 혜택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다문화가족지원법의 혜택을 받는 다문화가정은 부모 중 한 사람이 반드시 한국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외동포법에 따르면 현재 고려인 4세대는 외국인이다. 재외동포법은 ‘1945년 8월 이전을 1세대, 이후를 2세대로 규정하고, 동포 3세까지만 동포’라고 규정해놓았다. 때문에 동포 4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연령이 되면 국내에 체류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동반비자 기간이 종료되기 때문이다. 20세 이상 25세 미만의 청년은 대학생이 아닐 경우 비자 발급이 불허된다. 이로 인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고려인 청소년도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2013년 3월 시행된 ‘고려인동포법’(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을 위한 특별법)이 있지만 실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이 법에는 ‘정부는 고려인 동포의 합법적인 거주국 체류자격 취득 및 생활안정 지원을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고 관련 국가와의 협력 등 외교적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고만 서술돼 있을 뿐이다. 13년 전 고국에 들어와 고려인 동포를 돕는 마을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임이고르(55) 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강제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4세대는 또 다시 언어와 적응의 문제를 겪어야 한다” 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영숙 국장은 “‘재외동포법’은 해외 체류 재외동포 보호에 집중돼 있는 만큼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 국적 동포를 대상으로 한 귀환동포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 동포비자(F4비자)와 방문취업비자(H2)는 고려인들이 입국할 때 받는 비자다. 하지만 두 비자가 가진 맹점으로 인해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악덕업체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비자 발급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대부분의 고려인 동포는 동포비자(F4) 혹은 방문취업비자(H2)로 입국한다. 김경협의원실에 따르면 2014년 재외동포비자로 1만313명이, 방문 취업비자로 1만4705명이 입국했다. 하지만 이들 두 비자 제도에 큰 맹점이 있다고 한다. 동포비자는 매년 연장하는 식으로 국내 거주가 가능하지만, 단순노동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방문취업비자는 노동은 가능하지만, 최장 4년 10개월의 체류 기한이 끝나면 돌아가야 한다.
이런 제도상의 맹점은 곧 불법취업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동반비자(F1)로 남편을 따라 들어온 여성들도 불법취업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차별도 적지 않다. 조건 없이 동포비자를 발급받는 일본·미국 등의 재외동포와 달리 고려인들은 동포비자를 받기가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고려인에 대한 지원은 4대 보험과 노동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일반 외국인노동자보다도 오히려 미흡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상황이 나쁘다 보니 고려인들은 일부 악덕 인력사무소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야간조 작업을 기다리던 고려인 이모 씨는 “인력사무소나 일터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했다가는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 처우개선 요구나 불만을 쉽게 제기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때로는 고려인들은 불법폐기물 무단방류 등 범법행위에 이용당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아무래도 언어다. 자녀들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반도체 부품 조립공장에서 일하는 황 마리나(52) 씨는 “상사에게 지적받고도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 마음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 고 말했다.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고려인 동포 92.9%가 의사소통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고려인들이 한 곳에 몰려 살면서 저임금 단순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승력 너머 대표는 “고려인 동포들을 위해 한국어 교육을 하고는 있지만 새벽 5시에 집을 나와 11 시가 돼 귀가하는 이분들이 수업을 듣기가 어렵다”며 “그나마 공부를 시작했다가 기초반 이후에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2. 고려인 남편들을 따라 입국한 외국인 여성들은 동반비자(F1)를 가지고 입국한다. F1비자는 취업을 금지하고 있어 대부분 불법취업노동 현장에 노출된다. 임 이고르 씨가 한숨을 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에서는 지원받으려면 영주권을 얻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영주권을 받으려면 한국어능력시험(TOPIK) 3급, 통장 잔고 3000만원에 월 2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증명해야 해요. 그런데 일용직 근로자를 전전하는데 무슨 수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어떻게 월 2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오후 11시. 9시에 일을 끝마치고 한국어수업까지 들었다는 황 마리나 씨는 고단한 목소리로 “이제 자야 할 시간”이 라고 말했다. 황씨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야간작업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가족과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은 일주일에 딱 한 끼뿐이란다. 그도 내년이면 방문취업비자가 만료돼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다. 황씨의 꿈은 오직 하나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사는 것”이란다.
임 이고르 씨는 “얼마 전에는 고려인 한 분이 응급실로 이송 됐으나 금전적 이유로 강제퇴원을 당해 결국 목숨을 잃은 일도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말을 이었다. “숱하게 민족의 뿌리를 없애려는 각종 억압 속에서도 우리는 ‘카레이스키’로서 자부심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다. 한국인도 고려인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인은 아니어도 같은 한민족이잖아요?” 2017년은 연해주에서 살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불우한 역사를 딛고 뿌리를 이어온 고려인들의 꿈은 상당수가 모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해서 사는 삶이다. 코리안드림을 꾸며 고국을 찾는 고려인의 수는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러시아 발 엑소더스(Exodus)로 또 한 번의 ‘강제이주’를 경험한 고려인들은 고국에서조차 쉬이 정착하지 못하는 방랑자 신세다. 외국인 노동자도, 동포도 아닌 경계인으로서의 삶은 그들의 숙명인가!
박지현 기자·김준석 인턴기자 centerpark@joongang.co.kr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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