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련 거주 독립운동가 4세들
김해에 사는 고려인 4세 박봐짐(23)씨는 3개월에 한 번씩 항공료가 저렴한 나라로 출국한다. 박씨가 한국에서 부모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재외동포법에 따라 박씨는 만 19세까지 부모와 함께 방문동거 비자로 한국에 체류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단기방문 비자가 적용돼 3개월에 한 번씩 원치 않은 출국과 재입국을 이어가고 있다.
고려인은 구한말 및 일제 강점기 때 옛 소련권으로 이주해 현재 이 지역에서 거주하는 우리 동포를 말한다.
11일 김해지역 고려인연합회인 ‘구소련친구들’ 등에 따르면, 연해주 등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지에 살던 고려인들은 1930년대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고려인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한국으로 입국하기 시작해 국내에는 현재 4만여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경남 지역에 3000여명, 김해시에는 1500여명이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체류자 대부분은 고려인 3세와 4세들이다. 1~3세는 1992년 제정·공포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하 재외동포법)’에 따라 재외동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방문 취업(H-2), 재외동포(F-4) 비자를 받아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자녀인 고려인 4세가 만 19세가 되면 재외동포 비자를 받지 못해 3개월마다 한 번씩 출국한 다음, 재입국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외동포법 시행령 2조’는 동포의 범위를 ‘부모의 일방 또는 조부모의 일방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보유하였던 자로서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로 한정하고 있다. 사실상 고려인 3세까지만 동포의 자격이 인정되는 셈이다.
‘구소련친구들’ 관계자는 “이들은 만 19세가 되면 방문동거(F-1), 동반(F-3) 자격을 잃고 단기방문 비자를 받아 3개월에 한 번씩 원치 않은 여행을 하게 된다”며 “고려인 4세 자녀를 둔 부모들은 정신적·경제적 부담에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비행시간이 비교적 짧아 출국지로 선호하는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에도 왕복 항공료만 100만원에 달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만 19세 이후 단기방문 비자(C-8)를 받은 이들은 국내에서 아르바이트 등 경제활동을 전혀 할 수 없어 부모들에게는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고려인 3세 박라리사(43)씨는 “23살 된 아들은 나와 같이 살기 위해 3개월마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한다. 지금까지 지출된 비용이 500만원에 달해 경제적 부담이 크다”며 “서둘러 법이 개정돼 아들과 함께 한국에서 지냈으면 한다”고 하소연했다.
김형진 김해이주민주권센터 대표는 “현행법상 동포의 범위를 고려인 3세로 제한하는 것은 근거가 불분명하고 차별적 요소가 있다”며 “타국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고려인의 후손에게 마땅히 동포 지위를 부여하고 한국 사회에 정착하도록 법 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고려인 동포의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과 한국사회 정착을 위해 지난 4월 20일 출범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국민위원회’는 지난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국민인수위원회에서 대통령 비서실 하승창 사회혁신수석과 만나 ‘재외동포법 시행령’과 ‘고려인특별법 개정’을 논의했다. 박기원 기자